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개마고원.
 

드디어 다 읽었다, 진중권 씨의 좌파스러운 책. 난 진중권 씨를 미학 쪽 책으로만 알고 있어서 이런 책을 보니 신기했다. 즐겁고 유쾌하기는 했지만 그리 슬렁슬렁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다. 뭔가 생각해야 할 부분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있고...

총 두 권으로 된 이 책에서 필자는 신랄한 어조로 극우 파시스트들을 비난한다. 그가 주로 비난하는 대상은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를 비롯한 <조선일보> 기자들과 소설가 이인화 씨. (그러고보니 집에 이인화 씨 소설이 한 권 있더라. <초원의 향기>라는 녀석인데, 이 아이도 팍스 몽골리카 계열의 책이었나.) 필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해 그들을 농락한다. 해체주의? 그러면서 결국 필자의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의 '사도신경'이 나치, 그리고 김정일의 그것과 동일함을 밝히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읽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글투는 상당히 껄렁껄렁했지만 그에 비해 내용은 충실하다고 느꼈다.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확실한 편이고. 내가 좀 직접적인 비판보다 풍자로 비비꼬는 걸 좋아해서, 이 책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대상에게는 비웃음을 주는 게 최고인 것 같다.

물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사용되는 독일어/불어/일본어/한자는, 물론 일부러 쓴 것이겠지만 굳이 그렇게 쓸 필요가 있나 싶다. 필자가 국한문 혼용체를 비판하면서 그렇게 쓰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 같이 사회 상황에 무지한 사람은 갑자기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4장의 '아버지' 신드롬에 나오는 '아가씨'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아가씨 찾으려고 <레드 바이러스> 같은 책을 사서 읽을 수도 없잖아. 각주로 간단하게 설명이라도 달아줬으면 고마웠을텐데.

끝으로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 절을 소개한다.

(9장 레드 헌트의 '광신' 꼭지글. pp.263-264)

"실용"을 목숨처럼 안다는 <조선일보>. 지금 이거(옮긴이 주: 이단 논쟁) 하는 거다. 생각해 보라. 그들은 최장집 교수의 '정책'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게 뭔지도 아직 모른다. 또 자기들 나름대로 합리적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안(案)이 있어야 대안(代案)도 있지. 한마디로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정책'에 대해 쓰잘데없는 시비를 걸어 이 위기에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거다. 남한테 그거 못하게 하는 이 자들도 자기들이 필요하면 이렇게 맘껏 국론을 분열시킨다.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수도원에서 교리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호르케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정통이라고, 절대적 진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사탄숭배가 된다. 이 광신.

하긴 광신이 어디 우익들만의 일인가? 한때 대학가엔 주사파들이 들끓었다. 언젠가 그 중 하나가 어디서 구했는지 <김일성 장군 항일투쟁사>를 읽어 보라고 내게 권했다. 읽어 보니 난리가 났다. 무협지도 그런 무협지가 없다. 그런데 그걸 역사적 사실로 믿는 모양이다. 그때 나는 대학을 다니는 인텔리들이 어떻게 합리적 판단능력을 잃고 그런 만화책을 역사책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정도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나 역시 한때 마르크스를 하나님으로 알고 지냈으니까. 그때 우리 사이에서도 '이단'(소위 '수정주의')이니 '정통'이니 하며 쓸데없는 논쟁을 하곤 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광신'이라는 말을 종종 우익 파시스트들과 좌익 전체주의자들을 특징지우는 데에 사용하곤 한다. 그러는 자기들은 유일하게 '광신'에서 벗어나 있다는 듯이. 웃기는 얘기다. 이들에게도 종종 섬기는 우상이 있다. '시장'이라는 이름의 우상이다. 최근 어디선가 자칭 리버럴리스트라는 사람이 '대학의 비리를 없애려면 대학도 주식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주식회사에는 비리와 횡포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길까? 이런 철딱서니 없는 믿음도 광신에 속한다. '시장'의 논리를 광신하면 이렇게 자유주의도 얼마든지 천박해진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2년 전 잠시 귀국한 길에 어느 교회에 갔더니 마이클 잭슨이 사탄이라며 내한공연을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듣자하니 어떤 광신도들은 서태지를 악마라 불렀다 한다. 다른 교회에 갔더니 옆의 신도가 자기 동네에 있는 절간이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다른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의 말씀이 '길바닥에 십자가 메고 다니며 소음 일으키는 사람들이 문제는 좀 있지만 그래도 믿음 하나는 끝내주지 않냐'며 아예 신도들에게 권하신다. '여러분, 우리 광신도가 됩시다, 광신도가 됩시다.' 오, 주여! 환장하겠어요.

가끔 이런 막연한 느낌이 든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멘탈리티에는 광신에 빠지기 쉬운 어떤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가령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어떤 샤머니즘적 열정 같은 거 말이다. 이 열정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그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때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샤머니즘적 열정 때문에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문화든 우리 사회에 들어오면 그렇게 쉽게 광신적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알 수 없다. 어쨌든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근대적인 비판적·합리적 이성이 아직 우리들의 머리 속에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한 가지 증거일 수 있다.
by 로보스 | 2007/03/10 22:11 | |감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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