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onical ensemble
물리학 용어가 간지 난다는 어느 글을 보고 문득 시작한 작업.

통계역학에서 "microcanonical ensemble", "canonical ensemble", "grand canonical ensemble"이라는 놈들을 배우는데, 교과서건 교수님이건 이 녀석들이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 용어들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미소정준 앙상블(작은 바른틀 앙상블)", "정준 앙상블(바른틀 앙상블)", "대정준 앙상블(큰 바른틀 앙상블)"이라고 번역하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_- 난 이 용어가 겪은 역사를 모른 채 기계적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리고 일본어식 번역어의 영향으로) 이런 참사가 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검색해 보니, 이런 포스팅을 찾았다. 이 답변을 중심으로 내가 찾은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1902년 깁스 선생이 출판한 교과서가 이 용어들의 출발점인 것으로 보인다. 책 서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e consider especially ensembles of systems in which the index (or logarithm) of probability of phase is a linear function of the energy. This distribution, on account of its unique importance in the theory of statistical equilibrium, I have ventured to call canonical, and the divisor of the energy, the modulus of distribution. The moduli of ensembles have properties analogous to temperature, in that equality of the moduli is a condition of equilibrium with respect to exchange of energy, when such exchange is made possible. (p. xi)

즉, 깁스 선생은 열역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통계 분포를 "canonical distribution"이라고 명명한다.

재미있는 것은, "canonical ensemble"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정의된다기보다 "an ensemble canonically distributed"의 준말로 쓰인다는 것이다. 4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When an ensemble of systems is distributed in phase in the manner described, i. e., when the index of probability is a linear function of the energy, we shall say that the ensemble is canonically distributed, and shall call the divisor of the energy (Θ) the modulus of distribution. (pp. 33-34)

마찬가지로, "microcanonical"이라는 용어는 "distribution"과 붙어서 처음으로 나온다. 10장의 제목은 "On a Distribution in Phase Called Microcanonical in which all the Systems Have the Same Energy"이다.

An important case of statistical equilibrium is that in which all systems of the ensemble have the same energy. We may arrive at the notion of a distribution which will satisfy the necessary conditions by the following process. We may suppose that an ensemble is distributed with a uniform density-in-phase between two limiting values of the energy, ϵ' and ϵ'', and with density zero outside of those limits. Such an ensemble is evidently in statistical equilibrium according to the criterion in Chapter IV, since the density-in-phase may be regarded as a function of the energy. By diminishing the difference of ϵ' and ϵ'', we may diminish the differences of energy in the ensemble. The limit of this process gives us a permanent distribution in which the energy is constant. (...) We shall call the limiting distribution at which we arrive by this process microcanonical. (p. 115)

즉, 깁스는 canonical ensemble을 기본으로 삼고, 특별한 에너지 스펙트럼을 만족시키는 앙상블을 microcanonical ensemble이라고 따로 명명한 것이다. 이제 내가 왜 헷갈렸는지 알겠다. 내가 통계역학을 배울 때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러리라 생각하는데) microcanonical ensemble을 먼저 배웠다. 그리고 계+주위를 microcanonical ensemble로 보고 계와 주위 사이에 열 교환이 가능하다고 가정한 후 계만 다루면 canonical ensemble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러다 보니 왜 더 뒤에 나오는 녀석이 "canonical"인지 이해를 못했는데, 깁스의 사고 속에서는 canonical이 더 일반적이고 microcanonical은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그 이름은 왜 "micro"canonical일까? 다음 문장에서 깁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The use of formulae relating to a canonical ensemble (...) amounts to the consideration of the ensemble as divided into an infinity of microcanonical elements. (p. 116)

만약 canonical ensemble을 무한 개의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갖는) subensemble이 합쳐진 것으로 본다면, 이 각 subensemble은 "micro"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grand canonical ensemble의 어원을 찾아보자. 마지막 장인 14장에서, 깁스는 입자까지 교환 가능한 계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을 상상한다. 흥미롭게도, 깁스는 "grand canonical ensemble"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다. 그가 쓴 용어는 grand ensemble이었는데, 사실 그 "grand"를 일반적인 용어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조차 없었다!

[W]e shall now suppose that the systems constituting an ensemble are composed of particles of various kinds, and that they differ not only in phase but also in the numbers of these particles which they contain. The external coördinates of all the systems in the ensemble are supposed, as heretofore, to have the same value, and when they vary, to vary together. For distinction, we may call such an ensemble a grand ensemble, and one in which the systems differ only in phase a petit ensemble. A grand ensemble is therefore composed of a multitude of petit ensembles. The ensembles which we have hitherto discussed are petit ensembles. (pp. 189-190)

즉, canonical ensemble을 "작은(petit)" 앙상블로 생각하고, 그 앙상블이 모여서 만든 "큰(grand)" 앙상블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 깁스의 의도였다. 그 의도와는 달리 이 앙상블이 꽤 의미가 있었기에 grand (canonical) ensemble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microcanonical에 대응되는 이름은 macrocanonical이 아닌가 해서 불만이 있었는데(실제로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를 알고 나니 그냥 뭐 인간의 오해에서 기인한 이름이구나 싶어서 모든 게 용서되었다 ( - -);

결론은, 이 용어는 역사적인 이유로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게) 이름이 붙었으므로,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그 역사를 고려하여 좀 더 알기 쉬운 이름으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저 "canonical"을 "정준"이니 "바른틀"이니 하는 쓰지도 않는 단어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깁스의 원래 의도를 따라 "기준" "규준" "표준"과 같은 단어로 번역하고, "ensemble" 역시 "모음" "집합"과 같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번역하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분포"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통계역학에서 ensemble과 distribution은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게 많은 듯 하여...) 번역어를 한 번 던져보자면 이렇다.

canonical ensemble: 표준적 모음
microcanonical ensemble: 소표준적 모음
grand canonical ensemble: 거대 표준적 모음

("-적"은 일본어 어투이므로 쓰지 말자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적"이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어감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표준적 모음"과 "표준 모음"은 많이 다른 느낌...)
by 로보스 | 2018/02/09 06:39 | |과학|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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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조영래 at 2018/08/27 11:39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8/09/01 05:55
조영래님// 방문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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