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유전자와 PPI 네트워크
현대 진화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상으로 유전자 중복(gene duplication)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부모 세대에는 하나만 존재했던 유전자가 여러 이유로 인해 자식 세대에 여러 개 중복되어 들어가는 현상이죠.

(그림 출처: 위키피디어)

이 유전자 중복으로 인해 개체가 죽거나 불임이 되지 않는다면, 중복된 유전자들은 그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또 그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점차 원래 유전자와 달라지게 됩니다. 그 결과 중복된 유전자들 간에 갖는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두 유전자가 분업을 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조상 유전자가 A와 B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했는데, 중복 유전자 x는 A만, 중복 유전자 y는 B만 담당하도록 진화가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두 유전자가 분업을 하긴 하는데, 어떤 일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같은 일을 중복해서 담당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뭐하러 쓸데 없이 동일한 일을 여러 유전자가 담당할까요? 한 가지 설명은, 그 일이 너무 중요해서 한 유전자가 삐꾸가 되어버려도 (=변이가 일어나도) 그 일을 할 유전자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두 유전자가 분업을 하되, 어떤 일을 수행할 때는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갖는 경우입니다. 그 결과 진화 궤도에서 그 두 유전자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됩니다. 아래 그림이 이를 쉽고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 이 중에서 두 번째/세 번째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공통 조상 유전자를 둔 두 유전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하지만, 어떤 특정 일은 함께 수행합니다. 이런 유전자들을 유사유전자(paralog)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만약 유사유전자 쌍 중 하나를 개체 안에서 지워버린다면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두 번째 시나리오라면 해당 업무를 더 "열심히" 함으로써 사라진 유전자의 역할까지 대신하겠지만, 세 번째 시나리오라면 자기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해당 업무를 아예 포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에서, 랜드리 교수가 이끄는 캐나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좀 더 조직적으로 접근합니다. 우선 제가 위에서 사용한 "업무를 한다"는 모호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량화합니다. 단백질은 세포 내의 다른 단백질과 상호작용하여 많은 일을 수행하는데요, 특정 단백질이 어느 단백질과 잘 달라붙는지는 실험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측정 가능한 단백질들에 대해 반복하면 하나의 네트워크 구조를 얻을 수 있고, 이를 가리켜 단백질-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protein-protein interaction network; PPI 네트워크)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유사유전자 x와 y가 존재할 때, x의 PPI 네트워크와 y의 PPI 네트워크는 세포 내에서 x와 y가 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을 이제 바꿔 써보겠습니다. y를 지우면, x의 PPI 네트워크는 어떻게 바뀔까요? y와 공통적으로 달라붙는 녀석에게 더 강하게 달라붙을까요, 아니면 그 녀석과 달라붙기를 포기할까요?


이 연구팀은 효모(yeast) 안에 존재하는 56쌍의 유사유전자 쌍(즉 112개의 유전자)을 사용합니다. 각 유전자를 지워가면서, 그 짝 유사유전자가 PPI 네트워크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는 것이지요. 그 결과, 어떤 경우에는 PPI 네트워크가 더 강화되고(아래 그림의 compensation), 어떤 경우에는 더 약화되는 것(아래 그림의 dependency)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체에서 단답식으로 답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ㅋㅋ) 여기서 "강화"는 두 단백질이 서로 달라붙은 형태(복합체, complex)가 더 많아졌음을, "약화"는 더 적어졌음을 의미합니다.


PPI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해당 단백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mRNA 레벨을 조사해보니 유사유전자를 지웠다고 짝 유전자의 mRNA가 높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PPI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걸까요? 여기서 물리화학이 등장합니다 -_-)b

분자 A가 B와 달라붙어서 복합체 AB를 만들고, 분자 A가 C와도 달라붙어서 복합체 AC를 만드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A, B, C를 넣고 잘 섞어주면 적당한 평형 농도 [A], [B], [C], [AB], [AC]에 이를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A가 B에 비해 C를 무척 좋아한다면(결합 상수 K가 높다면), 대부분의 A가 AC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AB]는 그리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C를 싹 뺀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A는 할 수 없이 B와 달라붙어야 하고, [AB]는 좀 더 큰 값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게 이들이 밝힌 PPI 네트워크 강화의 원리입니다. 즉, B와 C가 유사유전자로부터 온 단백질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A는 이들이 동시에 달라붙는 목표 단백질이 됩니다. 단백질 C를 없앴을 때 [AB]가 증가한다는 것은, B의 양을 늘림으로써도 가능하지만, A와 C의 결합이 강했기 때문에 그 결합이 사라짐으로써 A가 B에 더 많이 달라붙게 될 때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걸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는 이렇게 멋진 말로 씁니다. "결합 평형의 이동은 유사유전자가 그 짝 유전자가 삭제되었을 때 그 손실을 벌충하는 분자적 기작의 하나이다. (a shift in the binding equilibrium is one of the molecular mechanisms through which one paralog can compensate for the deletion of its cognate copy.)"

자, 그럼 PPI 네트워크가 약화되는 기작은 어떻게 될까요? 이 경우, 연구진은 흥미롭게도 두 유사유전자가 생산하는 단백질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이를 이종결합체 유사유전자 heteromeric paralogs 라고 부릅니다). 이를 기반으로 이들은 그 단백질들이 서로 달라붙은 상태여야만 기능을 수행한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단백질은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 목표 단백질에 달라붙지 못할) 테고, PPI 네트워크는 약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근거는, 이종결합체 유사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유사유전자를 비교해 보면, 이종결합체 유사유전자의 경우가 삭제되었을 때 세포가 감당해야 하는 충격이 더 크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이종결합체 유사유전자들은 어디서 왔을까요? 서로 진화를 거쳐 다른 모습이 된 다음에 달라붙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원래부터 달라붙어 있다가 서로 진화를 거쳐 다른 모습이 된 걸까요? 이들은 이종결합체 유사유전자들의 산물 단백질들을 뜯어내서 각각 분리시켜 놓으면, 자기 자신과 달라붙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동종결합체(homomer)를 이룬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의 진화는 먼저 동종결합체를 이루고 각 단백질이 차차 진화를 거쳐 서로 달라지는, 다음 그림과 같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유사유전자를 삭제하는 것은 PPI 네트워크를 강화하기도,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 결합 평형을 이용해 물리화학적으로 강화를 이룹니다. 후자의 경우, 두 유사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는 상황이 많고, 이 경우 하나를 고장내면 나머지는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PPI 네트워크가 진화를 거치면서 유전자 삭제에 "견고해졌다"(robust)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그것은 한 면만 본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결론입니다.
by 로보스 | 2017/02/11 01:12 | |과학|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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