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물의 가열/냉각 곡선 (1)
오랜만에 "제가 쓴" 과학글 하나 투척합니다. 후배의 질문에서 시작된 글입니다.

중학교 2학년 "물상" 시간에 우리는 순물질과 혼합물에 대해 다루면서 혼합물의 가열/냉각 곡선을 배웁니다. 고체-고체 혼합물, 고체-액체 혼합물, 액체-액체 혼합물이 일정하게 가열될 때 혹은 냉각될 때 온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배우는 것이지요. (예제) 그런데 제 중딩 시절을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 이유를 설명해주시는 대신 일단 시험에 나오니 닥치고 외워라! 라는식으로 가르치셨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제 대딩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이유를 안 배웠거든요 -_- 화학 전공이었음에도 물리화학 시간에 잠깐 고체-액체 혼합물에 대해 다루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물을 좀 먹고난 지금, 이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상(phase)"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는 고체, 액체, 기체의 세 가지 상이 있다고 배웁니다. ("제4의 상"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겠지만 여기선 스킵...) 각 상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직관적인 설명 하나 가져옵니다.
고체=운동장에서 초딩들이 줄 맞춰서 서있는 상태
액체=운동장에서 초딩들이 걸어다니는 상태
기체=운동장에서 초딩들이 뛰어다니는 상태
플라즈마=운동장에서 초딩들이 알몸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반 광란의 상태.
참고로 그들이 벗어던진 옷이 바로 전자.
(아마 원출처는 2ch)
여기서 기억할 점 하나는, 고체 상태가 "줄 맞춰서" 서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액체에서 고체가 되기 위해서는 "줄"을 맞출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액체에서 고체가 되는 것(응결)과 액체에서 기체가 되는 것(기화) 사이의 큰 차이입니다.

그럼 온도 이야기를 해봅시다. 액체, 예를 들어 물을 냉장고에 넣었다고 칩시다. 점점 냉각이 되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얼음", 즉 고체가 됩니다. 이 때의 온도를 가리켜서 "어는점/녹는점"이라고 부르죠? 이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액체의 냉각 곡선 (출처)

그런데 어는점에서는 온도가 더 떨어지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가 되어요. 왜 그럴까요? 바로 "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온 비유를 써서, 액체 상태를 초딩들이 막 걸어다니는 상태로 비교해 봅시다. 어떤 초딩은 좀 빨리 걸어다니고 있고 어떤 초딩은 좀 천천히 걸어다니고 있어요. 우리는 이 녀석들로부터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음... 밥을 안 줘서 점점 배고프게 만든다고 치죠. 어느 이하로 에너지가 떨어지면, 초딩들은 모여서 줄을 맞춰 서기 시작합니다. (이게 초딩 비유가 좀 안 맞는 부분인데... 물질의 경우 줄을 맞춰 서는 것이 그냥 무질서하게 냅두는 것에 비해 더 낮은 에너지를 갖습니다. 어려운 말로 엔트로피!) 자, 실험을 해봅시다. 넓은 운동장에서 초딩들이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점점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초딩들의 속력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천천히 돌아다니던 초딩들은 지쳐서 이쪽 구석에서 줄을 맞춰 서기 시작하네요. 저쪽 구석에도 초딩들이 줄을 맞춰 서기 시작합니다. 이쪽 저쪽에서 초딩 "대열"이 만들어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대열끼리 연결되고, 결국에는 운동장에 있는 모든 초딩들이 줄을 맞춰 서게 됩니다.

이걸 온도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가 액체 상태로 있을 때에는 에너지를 빼앗는 것에 따라 온도가 같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어는점"에 도달하면, 에너지를 빼앗아도 그 에너지 손실이 분자들을 질서 있게 만드는데 사용되므로 온도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돈된 분자 수가 점점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모든 분자들이 다 정돈되면, 즉 전부 고체가 되면 다시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죠. (이 분자들이 모두 정돈되기까지 필요한 에너지 손실을 가리켜 "잠열 latent heat"이라고 하죠.)

그리고, 정돈된 상태는 한꺼번에 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정돈된 대열 뭉치들이 생겨나다가 그 뭉치들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나중에 전체를 다 집어삼키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계속해서 빼앗기는 상황에서는, 정돈된 대열 근처에 있는 초딩이 에너지를 잃고 대열에 합류할 확률이, 다 같이 돌아다니는 초딩 사이에 있는 초딩보다 더 높습니다. 따라서 처음에 초딩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작은 "대열 뭉치"가 있어야 하는데요, 이를 가리켜 "응결핵"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응결핵이 잘 생기기 때문에 앞서 본 것과 같은 냉각 곡선이 나타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예를 들어 액체를 계속 흔들어서 응결핵이 잘 못 생기게 방해한다면, 액체가 어는점 이하에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과냉각 액체"라고 부르고요. (참고할만한 흥미로운 자료가 있어 링크합니다. 약간의 오개념이 보이지만...)

응결핵이 생기는 걸 방해하는 또다른 방법은, 액체 사이에 불순물을 섞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인 "혼합물"이 등장하죠. 액체-고체 혼합물을 생각해 봅시다. 좋은 예로 설탕물이나 소금물이 있겠네요. 이 경우 고체가 액체에 비해 훨씬 적은 양임을 가정합시다. (묽은 용액) 이 시스템에서 에너지를 계속해서 빼앗는다면, 어는점을 지나면서 물 분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질서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 왜? 고체 분자들이라는 방해꾼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물 분자는 육각형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사이를 고체 분자가 헤집고 다니면서 그 구조를 못 만들게 방해하죠. 그래서 원래 어는점에서는 얼 수가 없습니다. 대신 에너지를 더 빼앗는다면, 액체 분자들끼리 구조를 만들려는 경향이 더 강해지면서 결국 방해를 물리치고(!) 고체 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온도 관점에서 보자면 어는점이 낮아지는 셈입니다. 이를 가리켜 "어는점 내림" 효과라고 부르죠.

어는점에서의 거동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순수한 액체의 경우 어는점이 되면 모든 냉각 효과가 다 구조를 만드는데 사용되므로 에너지를 계속 빼앗아도 모두 고체가 되기 전까지는 온도가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액체-고체 혼합물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 달라요. 액체들끼리 모여서 구조를 만들면서 고체 분자들을 아직 얼지 않은 액체 영역으로 밀어내버리고, 따라서 액체 영역에서 고체 분자의 농도가 점점 진해지게 됩니다. 이놈들의 농도가 진하면 진할수록 구조를 만드는데 '방해'가 심해지는 셈이므로 더 낮은 어는점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혼합물의 경우 액체가 얼기 시작해도 계속해서 온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림으로 정리하자면!
물과 소금물의 냉각 곡선 (출처)

이는 액체-액체 혼합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성립됩니다. 보통 혼합물 내의 두 액체가 완전히 똑같은 어는점을 갖지는 못하기 때문에, 한 액체가 먼저 얼기 시작하겠죠. 이 때 다른 액체 분자는 앞서 기술한 "방해꾼"의 역할을 하면서 어는점을 낮추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주죠 ㅋㅋ 화학적 관점에서 볼 때 소주는 에탄올(어는점 -114℃)과 물(어는점 0℃)의 혼합물인데, 얘를 얼려보면 0℃가 아닌 -20℃정도에서 얼기 시작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어는점 내림" 효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얼기 시작하면서 에탄올 함량이 높아지니까 온도는 계속 떨어질 거고요.

하아,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군요. 아직 기화 과정은 얘기도 못 꺼냈는데... 어쨌든 질문 받아서 쓰기 시작한 글이니까 차근차근 하나씩 써봅시다. 지겨운 글,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_ _)
by 로보스 | 2013/03/08 05:57 | |과학| | 트랙백(1)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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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dagio ma no.. at 2013/03/15 01:51

제목 : 공정혼합물의 융해/빙결
혼합물의 가열/냉각 곡선 (1)(Lobos) 로 보낸 트랙백 염화나트륨과 물의 상태도. 공정점(Eutectic point)은 온도 영하 21.1도, 염화나트륨 비율 23.2%이다. 참고로, 오른쪽 위의 halite는 우리가 흔히 아는 염화나트륨의 형태인 소금이다. 가운데의 hydrohalite는 소금......하고는 좀 다른데, 염화나트륨이 물 분자와 함께 저온에서 이루는 특수한 결정이다. 조성은 NaCl*2H2......more

Commented by as at 2013/03/08 10:24
감사합니다.
이해가 쏙쏙 되네요!
진작에 이런 설명을 읽고 공부했었으면 좋았으련만
영문도 모른채 닥치고 외우기만 학창시절이 억울하네요ㅋ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3/12 05:28
as님// 저도 그 학창시절이 참 억울합니다... 흑흑 T_T
Commented by shaind at 2013/03/08 11:12
근데 사실 정색하고 따져보면 얼음과 소금은 공정혼합물인지라, 혼합비율만 공정점에 제대로 맞추면 순수한 물의 냉각곡선과 마찬가지로 온도가 정체되는 구간이 생기죠.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3/12 05:29
shaind님// 앗,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잘 모르는 얘기로군요;
Commented by shaind at 2013/03/12 15:43
http://antoine.frostburg.edu/chem/senese/101/solutions/images/saltwater-phase-diagram.gif

대략 이런 이야기입니다. NaCl이 23.3 wt%일때 -21.1℃에서 공정점(eutectic point)가 있죠. 여기서는 얼음(고체)+염수(액체) 혼합물을 거치지 않고 염수(액체) -> 얼음 + hydrohalite(고체)로 바로 상변태하기 때문에 상변태가 완료될 때까지 온도가 정체되는 구간이 생깁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3/14 06:38
shaind님// 아하, 그렇군요. 흥미롭네요.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
Commented by 긁적 at 2013/03/08 19:03
헐. 이런 거였나 (.......................)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3/12 05:29
긁적 형// 뭐... 기초적인 얘깁니다 ( - -)y~
Commented by 매치어 at 2013/03/08 23:02
아.... 저 초딩 비유 정말 명문이닷!! 저런 약빤 비유(...)를 나는 언제 해보나... ㅠㅠ
용액의 총괄성에 대해서 이유는 배운 적 없었던가... (긁적~ 긁적~)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3/12 05:30
매치어 형님// 최소한 저는 기억이 없어서... 억사마께서는 그냥 화학 퍼텐셜을 가지고 "증명"해주셨던 것 같은데요;
Commented by 채널 2nd™ at 2013/03/15 23:57
이런 설명, 쏙쏙, 뒤에 들어옵니다.

추천!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3/16 02:26
채널 2nd™님// 방문 감사드립니다 :)
Commented by 랄라 at 2013/06/23 01:01
감사합니다 진짜 이해가 쏙쏙 잘돼요
Commented by 랄라 at 2013/06/23 01:19
문제집에서 소금물 냉각할때 농도가 진해진다는게 뭔말인가 했었는데ㅜ 드디어 이해했어요 친절한 설명 감사드려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3/08/01 06:12
랄라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
Commented by 쿠하하 at 2016/06/16 22:00
이 주제에 대한 발표를 해야하는데 덕분에 이해됐어요 엉엉 ㅠㅠ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6/09/23 01:23
쿠하하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
Commented by 배지트 at 2017/05/31 23:13
와우 도움되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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