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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평을 쓰니 기분이 참 묘하다. 그간 읽은 책도 여러 권 되지만, 이 책은 읽으면서 서평을 이런 방향으로 써야겠다는 느낌이 딱 들어서 이렇게 서평을 남긴다. 난 화학을 공부하는 화학도이다. (음 요새는 물리학도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긴 하지만 orz) 그리고 항상 화학에 대한 좋은 교양서가 없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우주나 소립자, 비선형 동역학 등에 대한 멋진 물리학 교양서들도 많고,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에 관한 유명한 생물학 교양서들은 많은데, 왜 화학 교양서들은 그렇게 없는 걸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화학 교양서들은 왜 그렇게 다들 어렵고 재미없는 걸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화학의 시대> 등) 내 "눈"이 너무 높은 걸까? 이 책은 제법 호평을 받았기에 내심 괜찮은 화학 교양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 역시 내 눈에는 안 차는 책이었다. 그래도 (로얼드 호프만이나 필립 볼의 책도 그렇듯이) 그렇게 나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하루 일과를 쫓아가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화학 제품'에 어떠한 것이 있는지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순수화학보다는 응용 쪽에 많이 치우친 느낌이 들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점이 나한테는 마이너스로 작용하긴 했다. 난 순수화학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 책은 너무도 고등학교 <화학 I> 교과서 같았다는 것이다. 어떠어떠한 용도로 사용되는 화학 물질이 뭐고, 그 물질을 만드는 방법은 뭐고, 그 물질의 특성은 뭐고, 그 물질의 응용 분야는 뭐고... 이 패턴이 계속 반복된다. 솔직히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일례를 들어볼까. 지금 마구잡이로 펼쳐서 나온 페이지에 있는 문단 하나를 따본다. 에틸렌을 염소 처리한 형태인 염화비닐로 중합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폴리에틸렌과 마찬가지로 긴 탄화수소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각각의 두 번째 탄소원자는 수소원자 대신 염소원자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폴리염화비닐의 약자인 PVC는 가공하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질기고, 잘 긁히지 않으며, 깨지지 않고 불이 잘 붙지 않으며, 수명이 길뿐만 아니라 첨가제를 이용하여 유연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생산비가 가장 저렴한 합성수지 중 하나로 음료수병, 혈액주머니, 오줌관, 전선 피복, 수도관, 용기, 창틀, 쓰레기통, 바닥재, 정원 가구, 울타리, 랩, 인조 가죽, 호스와 구두 뒤축 등 여러 가지 용도로 널리 쓰인다. (225-226쪽) 예측할 수 있듯, 이 장은 "합성 수지"를 다루는 장이다. 자, 이 내용이 <화학 I> 교과서, 내지는 위키백과의 설명과 크게 다른가? 이게 '교양서'로서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좀 의구심이 든다. 현대 화학의 여러 지식들을 적당한 수준으로 가공해서 제공하기만 하면 그게 '교양서'가 되는 걸까? 내가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화학 I>에서 '탄소 화합물'을 만나면서 화학을 포기했다고 하던데, 이런 설명은 그 '탄소 화합물' 장의 설명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설명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이 그 사람들에게 화학의 재미를 어떻게 일깨워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너무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다루려고 하다보니 <화학 I>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어마어마하다. 목차를 펼쳐보면, 신체화학, 계보, 화장품과 도료, 키랄성, 천연섬유와 화학섬유, 염료의 고전, 섬유 개량, 태양전지, 연료전지, 석유, 바이오 제품, 작용물질 연구, 암 연구, 에이즈 연구, 천연 치료물질, LCD 기술, 마이크로기술과 나노기술, 식료품화학, 기능성 식품, 농화학, 화학과 자동차, 합성수지, 기호식품, 세제, 자연분해가 가능한 합성수지, 포장지와 쓰레기, 독성물질, 화학무기, 법의학, 하이테크 중합 시스템, 나노입자, 자체 정화 메커니즘, 폴리탄산에스터, 보석, 풀러렌, 문화재 복원, 전달물질, 화학과 유전자, 마약, 니코틴, 진단(헥헥)까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주제들을 쓱 훑어보면 알겠지만 화학이 이용되는 분야라는 분야는 거의 다 섭렵한 듯 하다. 이 많은 내용을 한 권의 책에서 다 다루려고 하다보니 '수박 겉핥기'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종종 배경지식 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일반화학 레벨, 혹은 그 이상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심지어 감수하신 분조차도 '감수의 글'에 이런 말을 남겨두었다. 저자들이 쉽게 쓰려고 노력했음이 분명하지만 화학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에게도 생소한 부분이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암기가 아니고 이해라고 한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테니까. (441쪽) 그니까 제 말이, 그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입니다요 -ㅅ- 몇 가지 더 지적하고 글을 맺으련다. 이 책은 올컬러로 만들어졌고, 페이지 곳곳에 삽입된 여러 사진들이 참 눈을 즐겁게 해준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있기 마련. 책이 무지 무겁다 -_-;; 애초에 400 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각 페이지마다 전부 코팅지를 사용했으니, 지하철에서 서서 읽기엔 팔 근육에 좀 무리가 가는 책인 것 같다. (내 근력이 약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ㅋㅋ) 번역은 잘 되어있다. 번역하신 분이 화학 전공이 아니고 독일 문학 전공이신데, 화학과 교수님이 감수를 보셔서 두 사람의 강점이 잘 조합된 듯 하다. 보통 전공자가 번역하면 글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게 되고, 비전공자가 번역하면 헛소리가 난무하게 되는 위험이 있는데, 이 책은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전기마당'. '자기마당'이 조금 눈에 걸리기는 했지만 ㅋㅋ 뭐 그 정도는 한국물리학회에서도 인정하는 용어니 패스! 애초에 화학 내지는 교양과학을 좋아했고, 이런 식의 단편적 지식 얻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응용)화학에 관한 무지 잡다한 지식들을 얻어갈 수 있을테니. 하지만 그 외의 독자들에게 '화학 교양서'로서 좋은 책인지는, 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내 눈이 너무 높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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