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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의 계보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이어아벤트. (이 책에선 '페이어아벤트'라고 번역했다만 -_-) 일반적으로 그리 이미지가 좋지 않은 듯 하다. 하기사 내가 퍼온 글들만 봐도 '이성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면 손사래를 칠 내용들 뿐이니. 후배가 철학 수업 과제에 쓸 예시를 찾길래 이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교수가 파이어아벤트 이름을 듣자마자 거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그렇게 까이는 걸까? 파이어아벤트의 대표작인 이 책을 살펴보면 정답이 나온다. 우선 책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하의 분류는 내가 한 것이므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 서론-5장: 기본적인 논증 전개 * 6장-13장: '갈릴레이'에 대한 사례 연구 * 14장-15장: 현대 경험주의의 세 가지 문제 * 16장: 임레 라카토스의 이론과 그에 대한 반론 * 17장: '의미'의 문제 * 18장: 결론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전반부에서 중요한 얘기를 다 해버린다. 사실 서론에서 5장까지 읽고 18장만 읽어도 파이어아벤트 이론의 핵심은 다 알 수 있다. (특히 책의 후반부에서는 주로 제기된 반론들을 재반박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 글에서도 모든 장을 공평하게 다루는 대신, 내 멋대로 파이어아벤트 이론을 재구성해서 정리하도록 하겠다. 우선 파이어아벤트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살펴보자. 서론 본문의 첫번째 문장을 볼작시면, 다음의 에세이는, 아나키즘이 가장 매력적인 정치철학은 아닐지라도, 인식론과 과학철학에 대해서는 매우 훌륭한 처방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다. (15쪽, 강조는 필자) 우리는 흔히 특정 규칙을 따라서 과학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적절하지 않다. ① 효율성 ② 정당성이 그것이다. 효율성이라 함은 '실제로 그 규칙을 따랐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가?'를 얘기한다. 파이어아벤트는 역사적 예를 들어 실제 과학 연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규칙에 따라서 진행되지 않았음을 논증하고, 동시에 현재 입장에서도 과학이 다루는 영역은 대부분 미지의 영역이므로 지금의 규칙이 그 영역을 다루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보장이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파이어아벤트는 책 전반에 걸쳐 실제 과학 연구가 어떻게 행하여졌는가를 논한다. 특히 파이어아벤트가 사랑하는 예는 갈릴레이인데, 실제로 갈릴레이는 당시의 '합리적인' 사고에서도 허용될 수 없었던 주장들을 여러 '기술'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수긍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갈릴레이가 옳았다고 보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과학 연구를 할 때 갈릴레이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이런 흐름이다. (갈릴레이만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물리학의 여러 업적들 -- 예컨대 상대론이나 양자역학 -- 을 가지고도 예시로 삼는다. 문제는, 포퍼가 그러했듯, 예시들이 너무 물리학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 -_-) 정당성이라 함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으냐는 질문이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현대의 윤리관 속에서, 특정 사상을 교조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인도적으로 옳겠는가? 파이아아벤트는 묻는다. (내가 예전에 어딘가에서 ②에 해당하는 소리를 했다가 열라 까인 적이 있는데 -_- 나만 미친 건 아니었나보다.) 그럼 파이어아벤트는 과학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믿는가? 역사가에 의해 제공되는 풍부한 자료를 찾아낸 (중략) 사람들에게는, 모든 상황에서 또 인류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옹호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원리이다. (27-28쪽, 강조는 필자) 전에 한 번 이야기했던 것[1]이 바로 이 이야기다. 모든 종류의 해석을 허용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게 하라.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그것이 과학을 작동시키는 원리다. 파이어아벤트는 여기서 바람직한 예로 중국 공산 정권이 전통 의학을 부활시킨 것을 들고 있는데, 물론 파이어아벤트의 설명에는 부합하지만, 어쨌든 과학자들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한의학이 과학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어아벤트는 아나키스트다. 파이어아벤트는 전통 의학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대안 과학을 링 위에 올렸다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음에도 혹시 파이어아벤트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중요한 구절을 하나 인용한다. (전략) 혹자는 내가 귀납을 반귀납으로 대치하고, 이론/관찰의 관습적인 2분법을 대신해서 이론의 다양성과 형이상학적 관점들, 옛이야기들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권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질런지도 모른다. 이 인상은 분명히 오해이다. 나의 의도는 일련의 일반규칙을 다른 일련의 일반규칙으로 대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도는 오히려 모든 방법론은, 가장 분명할 것일지라도 자기나름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아나키스트는 이성(진리, 정직, 정의 등)의 권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이성이라는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비밀공작원과 같은 것이다. (33-34쪽, 강조는 필자) 파이어아벤트는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과학 이론보다 신화 이론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저 모든 '방법'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일 뿐이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자. "아나키스트는 이성의 권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이성이라는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비밀공작원과 같은 것이다." 이러니 철학자들이 좋아하겠나, 과학자들이 좋아하겠나 ㄲㄲ -- 여기서 맺으면 딱 좋겠다만, 몇 가지 잡담을 하고 싶은데 넣을 곳이 없어 맨 뒤에 덧붙인다. 먼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87년, 재판을 찍은 것이 1991년이다. 그리고는 절판됐다. 지금은 알라딘에 상품정보조차 없을 정도로 구하기 힘든 책이다. 아놔... 이런 책들은 좀 꾸준히 찍어줘야 하는 것 아님? 구하는 것도 무지 힘들었다 ;ㅁ; 뭐 돈이 안 되는 건 알겠다만... 이러다 보면 또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 대한 한탄으로 흘러갈 것 같으니 이쯤에서 멈추겠다. 과학철학 오타쿠인 캐갑부 독지가가 나타나서 이런 책을 계속 찍어낼 수 있도록 후원해주면 좋을텐데 ㅋㅋ 번역된 제목에 대해서도 불만이 조금 있다. 이 책의 원제는 Against Method이다. 이 제목을 <방법에의 '도전'>으로 번역했는데- 꼭 틀린 번역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충실히 직역해서 <방법에 반하여>라고 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왜? 쉽게 까기 위해서는 일본어투라고 까면 된다 ㅋㅋ "에" + "의"와 같은 '일본어식' 용법에 알러지 반응 일으키는 분들이 좀 많으니까. 근데 사실 나는 그보다 '도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조금 불명확해서 싫다. 전술하였듯이 파이어아벤트는 인식론적 아나키스트다. "무엇이라도 괜찮다." 이외의 어떤 종류의 방법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도전'이라고 하면, 어떤 종류의 방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특정 방법(현재의 방법?)이 마음에 안 드니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차라리 직역인 <방법에 반하여>가 좀 더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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