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는 바보가 아닙니다.
철학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방법에의 도전>에는 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글이 실려있다. 부론 4다.

라카토스는, 어떤 단계에서는 인식론적 아나키즘을 논증에 의해 격파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일 수는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0층 빌딩에서 에레베이터[sic]를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외고집을 부리면서 창문을 통해 걸어나오려고 하는 인식론적 아나키스트가 어디 있겠는가? (251쪽)

예전에 어느 과학 선생님이 해준 얘기. 어떤 철학자가 신호등 앞에 서서 곰곰히 생각했단다. '내가 왜 저 신호등에 맞춰서 길을 건너야 할까?'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결국 빨간불일 때 도로를 뚜벅뚜벅 걸어갔고 그 자리에서 장렬히 산화했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정말 저질이다. 그 선생님은 철학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주워들은 것만 갖고 철학 전체로 일반화했든지.

자, 어찌됐든 이번엔 라카토슈가 파이어아벤트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라카토슈는 저 과학 선생님처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인식론적 아나키스트', 즉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중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믿는 사람을 정확히 지목해서, "만약 그가 정말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고 믿는다면 중력도 사실이 아닐지 모르니 50층 빌딩에서 뛰어내려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창문을 피해 에레베이터에 타는 아나키스트의 사례는, 아나키스트도 때로는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아나키스트나 그의 동료들이, 예를 들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가장 진보된 연구프로그램이 제시한 가장 적절한 행동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어떤 합리성의 이론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중략) 한편, 인식론적 아나키스트는 습관에 반대되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의무지워져 있지 않다. (중략) 그가 부정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합리성의 이론의 기준에 일치하는 두려움의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고, 따라서 그러한 기준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고, 아나키스트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51-252쪽, 강조는 필자)

조금 길게 인용했다. 번역이 형편 없어서 잘 안 와닿을 수 있으므로 조금 부연하겠다. 아나키스트가 부정하는 것은 '특정 설명 방식'이 진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걸 부정한다고 해서 꼭 그 법칙이 이야기하는 것의 반대로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중력의 법칙이 예측하는 바에 따르면, 50층에서 떨어지면 대개 죽는다. 따라서 죽기 싫으면 50층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50층에서 뛰어내리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고 해서 중력의 법칙을 인정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난 50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지럽기 때문에 그 느낌이 싫어서 그냥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래도 나는 아나키스트일 수 있다. 왜? 나는 특정 설명 방식을 갖다붙이지 않았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1]이 있는데, 그 때 나의 답은 "현실과 설명 방식(=과학)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설명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곧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였다. 즉, 뛰어내리는 행위는 '현실'이고, 뛰어내리면 어떠어떠해서 어떻게 된다고 예측하는 것은 '설명 방식'이다. 난 '설명 방식'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현실'은 인정하겠어! 지금 생각해보니 뽜이야 횽과 비슷한 대답을 했군 ㅋㅋ 나 좀 짱인 듯?
by 로보스 | 2009/10/15 14:54 | |잡념|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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