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프리고진, <확실성의 종말>, 사이언스북스.

예전에 물리화학 III에서 속도론 쪽을 배우면서 진동 반응(oscillating reactions), 화학 카오스(chemical chaos) 등을 공부했었다. 그 때 배운 주제 중 하나인 BZ 반응에 대해 글을 하나 쓴 적도 했는데, 여하간 나에겐 굉장히 흥미로운 분야이다. (근데 앳킨스 이 생퀴가 8판 오면서 다 빼버렸다 T_T) 헌데 특별히 이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겨 노벨상까지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에게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있겠는가 ㅋ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이다!

지난 번에 짧게 소감을 썼지만, 이 책은 정말 충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에서 일반적으로 믿어져온 '결정론'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결정론은 넓은 의미의 결정론으로, 심지어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까지 포함한다 ㄷㄷㄷ (이것 때문에 내가 양자역학이 고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이 부분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므로, 조금 자세하게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필자는 여기서 양자 패러독스(quantum paradox)를 소개한다. 양자역학의 과정(process)에는 순수하게 결정론적인 과정과 순수하게 확률적인 과정이 있다. 전자가 바로 그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특정 시각에서 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고 있다면 그 이후에 계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면 이후에 계의 상태가 어떻게 변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 과정이 바로 측정(measurement)인데, 이 부분이 바로 양자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부분이다.

가능성에서 현실로 옮겨 가게 되는 것은 우리의 측정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I절에서 인용했던 스티븐 와인버그의 주장이 바로 그런 입장에 해당한다. 이제 우리는 시간 패러독스에서와 똑같은 설명으로 되돌아왔다. 시간 패러독스에서도 관찰과 같은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가능성에서 현실로의 전환을 일으키는 이유가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진화가 달라지게 되는 것일까? (55-56쪽)

여기서 살짝 첨언하자면, 에버렛 해석에서 코펜하겐 해석을 문제시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다[1]. 어째서 하나의 세계를 다루는데 전혀 다른 두 개의 과정이 필요한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면 코펜하겐 해석은 무력하게 무너졌는가? 아니다. 필자는 이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의 대답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도 함께 기술한다.

(전략) 간단히 말해서 보어는 측정 장치를 고전적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부 종교에서 우리가 <다른> 세계와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성직자나 무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거시 세계에 속한 우리 인간이 미시 세계와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중재자 intermediary>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이 우리가 측정에 사용할 물리계의 특성을 정확히 규명하는 처방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보어의 해석은 어떤 종류의 동력학적 과정이 파동 함수의 붕괴를 가져 오겠는가라는 근본 문제를 회피했다.
(후략, 57-58쪽, 강조는 필자)

이외에도 코펜하겐 해석을 옹호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소개하면서, 필자는 한편으로 그 모든 설명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다. (반박하고 싶으신 분은 내 독후감에다 뭐라고 하지 말고 그냥 이 책을 직접 읽으시길 추천드린다.) 그 문제점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필자는 그 실마리를 '비가역성'에서 찾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열역학의 '비가역성'은 '시간의 화살'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어째서 잉크가 확산되는 반응은 자연스레 일어나는데 그 역반응은 일어나지 않는 걸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확률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설명한다. 랜덤하게 움직이다 보면 확률이 더 큰 상태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새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일단 아래 그림을 보자.


위 그림에서 각 선은 안정한 열역학적 가지를 의미한다. 즉, 가지에서 벗어나도 금방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림의 오른쪽으로 갈수록 평형에서 멀어진다. 멀어지다보면 중간중간 여러 해를 갖는 '가지 치기'가 발생한다. 여기서 어느 가지를 택할지 어떻게 결정되겠는가? 그렇다. 확률이다. 그렇다면 한 번 가지를 택하게 되면 그 과정은 비가역적인 과정이 된다. 이렇게 비평형 과정이 일반적인 과정이라면 비가역성을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비선형 동력학을 들었다면 좀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텐데, 내 능력은 이 정도까지가 한계인 듯 싶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평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과 같다는 것은 어떻게 보이지? 이 책이 좀 어려운 책이다보니 그걸 논증했음에도 내가 코마 상태에 빠져 그냥 지나친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내 기억에는 증명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님 너무 자명한 건데 내가 못 깨닫고 있는 건가 --;

자, 여기까지가 고작 2장까지의 내용이다 -_- 아 쓰는 내가 다 혼란스러울 지경인데 여기까지 읽은 분들도 대단한 듯 싶다. 존경해요- 급귀찮아진 관계로 이 뒤의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하며 지나가련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직접 보시길;

3장과 4장에서는 개체적 설명과 통계적 설명의 동등성을 무너뜨린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많은 수의 개체가 있다고 가정하고 각 개체의 궤적을 하나하나 모아서 만든 이론과 처음부터 분포함수를 가정해서 그것만 갖고 꼼지락거린 이론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배운 많은 경우들에서는 두 이론이 같지만, 이 책에선 카오스를 예로 들어 두 이론이 달라지는 경우를 보여준다. 그럼 결론은 뭐다? 개체적 설명을 포기하고 통계적 설명을 택해야 한다!

이렇게 떡밥을 깔아놓고 5장과 6장에선 각각 고전역학, 양자역학에 해당하는 필자의 '확장팩'을 소개한다. 여기 나오는 내용들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튼실히 알고 있어야 100% 이해 가능한 것 같다. 즉, 늅늅이인 로보스는 100%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_@ 따라서 그냥 흥미로운 내용 몇 개만 메모하고 지나간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5장에서 필자는 고전역학을 다룰 때에도 '파동함수'와 같은 비편재 함수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 이유는? 실제 입자는 진공 속에서 놀지 않기 때문. 실제 입자는 수많은 입자 속에서 움직인다. 만약 어느 입자와 입자가 충돌하면 그 두 입자는 서로의 정보를 갖게 되는데, 이를 '상관성'이라 부른다. 이 상관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과정 중 어떤 것들(QED의 골치덩어리였던 가상 입자의 쌍생성-쌍소멸 쌍을 떠오르게 하는 녀석들이다)은 기존 고전 역학에서 다룰 수 없기 때문에 필자의 '확장팩'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6장에서는 이 상관성이 해밀터니안의 고유 함수로 '특이 함수'들 -- 예컨대 델타 함수 -- 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힐베르트 공간을 확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함수들의 고유값은 복소수 형태가 될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에너지가 실수가 아니게 된다! 그러면서 평형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통계적 설명만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에이 잘 모르겠다 =_=

7장부터 9장까지 필자는 자신의 이론을 확장해 이런저런 현상에 적용해본다. 뭐 앞에서처럼 하쉬하게 적용하는 건 아니고, 우주론이라든지 진화론 등에 나타나는 '시간'의 의미를 자신의 이론을 통해 재해석하는 정도랄까. 이 부분은 물리를 잘 몰라도 재미있을텐데, 나는 앞부분을 읽느라 지쳐서 =ㅅ= 정작 이 부분에선 머리에 남은 게 없다 ;;;

이 책을 주문하면서 물리화학 III에서 배운 것과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한 가득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부제도 "시간, 카오스, 그리고 자연 법칙"이라 카오스 쪽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화학과 교수인 이덕환 교수님이 번역했으니 정말 '화학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지겠지? 하지만 이 책은 전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솔직히, 물리를 잘 모르니 맞는 얘긴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참신한 충격이었다. 내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생각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련다 :) 하지만 남들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 ㄷㄷㄷ;
by 로보스 | 2009/09/28 23:08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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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9/29 09:3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9/29 10:53
비밀글님// 흠. 그게 문맥상 창발성 얘기는 아니었어요. 설명하기가 좀 힘든데, 직접 읽어보시는 건 어떤지 T_T
Commented at 2009/09/29 11: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9/29 13:47
비밀글님// 잘 읽고 저한테도 설명해주세요 ^^
Commented by 련! at 2009/09/29 18:38
역시 너의 글은 캐 어려움...ㄷㄷ

화학공부 다시 해야겠다.-_-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9/30 09:28
련!// 이건 내 글이 어려운 게 아니라 저놈의 책이 어려운 거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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