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블로그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난독증'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난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지만) 블로그 세상에서는 필자가 의도한 대로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 독자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오독하고 '잘못된 반응'까지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몇몇 유명한 블로그에선 이런 '난독증' 환자가 등장하면 필자, 혹은 '올바르게 읽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들을 징계한다. 이와 같은 징계 과정을 거쳐 우리는 특정 포스팅에 대한 '올바른 독해'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자, 그럼 이번에는 조금 다른 '독해' 상황을 가져와보겠다. 봉준호 감독의 유명한 영화 <괴물>은 괴물에 맞서 싸우는 한 가족의 사투를 그린 영화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여기에 봉 감독이 NL 계열에서 학생 운동을 했다는 배경 지식을 가져와서 <괴물>은 사실 미 제국주의의 탐욕과 그를 따르는 한국 정부의 무능력함을 비판하기 위한 영화라고 주장한다. 자, 영화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정보만을 가지고 영화를 해석하는 것과 여러 지식들을 활용해서 해석하는 것, 어느 쪽이 옳은가? 봉 감독이 어느 쪽이 답인지 말을 해준다면 '올바른 독해'가 어느 쪽이었는지 알 수 있겠지만, 그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우리는 각자의 추측을 내세우며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떠들고 있을 것이다.

하나 더 보자.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은 조낸 고전적인 떡밥으로 아마 대한민국 중등교육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럼 잠깐 문제. 여기서 의 의미에 해당하는 것은? ① 사랑하는 연인 ② 신적 절대자 ③ 잃어버린 조국. 무엇일까? 아마 국어 시간엔 이들 모두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한용운 시인이 정말 그 세 가지를 전부 염두에 두고 시를 썼을까? 세 가지 모두 '합리화'를 시킬 수 있고, 시인은 이미 작고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물어볼 곳이 없어서 어느 해석이 맞는지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님의 침묵>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A씨는 모 기업의 총수 B씨의 측근으로, B씨에게 항상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왔다. 헌데 B씨가 어느 날 갑자기 기업 경영에서 손을 뗀다고 선언하고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A씨는 B씨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B씨의 마음은 확고했고, 결국 A씨는 '주군'을 잃은 것과 같은 슬픔에 빠졌다. 이 때 A씨가 <님의 침묵>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 '님'의 자리에 B씨를 대입해서 읽지 않았을까? 자, 우리가 알고 있는 해석 중에 '님'을 기업 총수로 보는 해석은 없다. 그럼 A씨의 해석은 '틀린' 것일까?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해석'의 순간을 마주친다. 해석학(hermeneutics)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해석' 과정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해석'은 그리 간단한 활동이 아니다. 첫번째 예에서 설명한 것처럼,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는 해석을 찾는 과정'을 해석의 핵심으로 볼 수도 있고, 마지막 예에서 본 것처럼, '나에게 의미있는 해석을 찾는 과정'을 해석의 핵심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사실 이 질문은 해석학계의 오랜 떡밥이다.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전통을 따르는 베티와 하이데거의 전통을 따르는 가다머가 양 진영을 대표하는데, 여기서는 이들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해석학이 어떠한 학문인지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베티는 '객관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해석학자이다. 그는 대상은 오직 대상일 뿐이고,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이 어떠하든지 대상에 대한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대상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을 예로 든다면, "과연 한용운 시인의 의도는 무엇이었겠는가?"를 찾는 것이 해석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님'을 기업 총수로 보는 해석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한용운 시인이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해석학을 금석학이나 문헌학에 가깝게 위치시키게 될 것이고, 아마 근대과학의 객관화/대상화 관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쪽이 당연하게 보일 것이다.

반면 가다머는 '상대적인' 해석을 이야기한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복잡하게 떠들지 말고 대충 뭉뚱그려서 설명하겠다. 우리들이 세상을 이해할 때, 정말로 원자-분자-세포-기관으로 이어지는 과학의 '분석적' 구조를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는가? 내 앞에서 떠들고 있는 친구는 하나의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고, 내가 느끼는 '행복'은 신경 세포 간의 전기적, 화학적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상 인식하면서 사는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세계(생활세계, Lebenswelt)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럼, 어떤 현상이든,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내 블로그에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간단한 글이 있으니 참고하길.)

가다머의 해석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텍스트가 '이해'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텍스트가 나 자신의 선이해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선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등장해도 괜찮은 것 아닐까?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바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가 중요한 것이니까. (조금 더 첨언하자면, 이렇게 해서 얻는 깨달음을 '진리'라고 부르는데, 이 '진리'가 저자가 깨달은 체험인지(딜타이), 존재의 본성인지(하이데거), 구원의 의미인지(불트만)에 대해서는 이쪽 라인 해석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각각인듯 하다.) 이 관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이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해 본 주제들이 몇 개 있다. 글이 너무 길어지니 별도로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글이 계속 길어지고 있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한 마디만 덧붙인다. 베티의 해석과 가다머의 해석이 서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디 인간의 '해석'이라는 것은 선이해와 텍스트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당연히 어느 정도의 객관성(텍스트에서 기인하는)과 주관성(선이해에서 기인하는)을 내포하고 있다. 베티나 가다머나 모두를 인정하고 있고, 다만 그 차이라면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있는 것 뿐이다. 설명을 위해서는 차이점을 부각시킬 수 밖에 없으니, 혹시 둘이 전혀 다른 소리를 떠드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분이 계실까봐 이렇게 사족을 붙인다.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는 책이 바로 리차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이다. 나 같은 늅늅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쉽고 흥미롭게 쓰여졌다. 한 가지 안습인 점이 있다면, 본문의 조판 상태(?)가 매우 옛날틱하다는 것이다. 글꼴, 자간, 장평, 여백 등이 전부 안습이다 ㅠ_ㅠ 아마 처음 번역한 88년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 하다. 표지는 그럴싸하면서 내용은 왜 그래!
by 로보스 | 2009/07/06 15:51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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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Bloodstone at 2009/07/06 16:09
교양수학 공부를 하다 포스팅을 보고 analytics에 대한 책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분야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다른 건 몰라도 사회생활-_-;;은 인문학적 지식이 없으면 곤란한 것 같더라구요. 이것저것 읽어 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7/06 17:13
Bloodstone님// 좋은 생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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