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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는데,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해석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쓸 기회가 있을 것 같고, 일단은 인간의 '이해'와 '해석'에 관한 학문이다- 정도로만 알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거 정의도 학자마다 다 다르고 막 그래서 나름 조낸 복잡하더라고...) 여기서는 특별히 이 책에 나오는 개념 중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내 앞에 <님의 침묵>이 떡하니 놓여있다. 나는 다음 구절을 읽고 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이 구절에 대해 '이 인간 아주 눈깔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였네? 그래 솔로는 죽으라 이거지? 염장 즐!'과 같이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왜? 그건 이 시의 '주제'에 벗어나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시에다 대고 염장질이라는 건 완전 헛다리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글의 각 부분을 알기 위해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주제'는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그 글을 다 읽어야 알 수 있다. 그런데 글의 각 부분을 해석하려면 주제를 알아야 한다며? 간단히 말해, 전체를 알기 위해선 부분을 알아야 하고, 부분을 알기 위해선 전체를 알아야 한다. 이런 젠장, 순환이잖아! 이걸 가리켜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ycle)'이라 한다. 그럼 이 순환을 어떻게 해결할까?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해결책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가 저 순환 고리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글의 주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면 그 글의 '어느 부분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글의 주제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뭐야. 그럼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관한 책은 우리가 영영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인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란 있을 수 없다. 예컨대 내가 옴진리교의 경전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난 옴진리교에서 가르치는 바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한 종교의 경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종교가 일본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정도의 지식만 있더라도 해석학적 순환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 내가 전혀 처음 보는 문학 작품을 눈 앞에 대면했다고 치자. 난 그 글을 누가 썼는지, 제재가 무엇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 글이 시인지 소설인지 희곡인지는 알 수 있으니까. 아니, 애초에 '문학'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어떤 텍스트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리켜 선지식(Vorwissen), 혹은 전이해(Vorverständnis)라 한다. 다음으로, 저 순환 고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생각해보자. 전체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부분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전체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이 사이클이 한 번 돌 때마다 지식의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면 (즉 부분으로부터 얻은 전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지식이라면) 이 순환은 말 그대로 아무 의미없는 무한 루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책을 한 번 읽을 때, 그 다음으로 읽을 때, 또 다시 읽을 때 매번 책이 주는 의미가 달라지는 걸 경험해봤을 것이다. 이는 전체에 대한 지식이 부분에 대한 지식을 '새로이' 얻게 해주고, 그렇게 확장된 지식은 전체에 대한 지식을 더 '늘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 점점 지식의 양이 늘어날 것이고, 결과적으로 더욱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전체와 부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라 한다. 정리해보자. 우리가 하나의 글을 이해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선지식이 0이 아닌 초기값으로 존재한다. 그럼 우리는 이 초기값을 기반으로 글 전체를 '조금' 이해한다. 이 이해를 가지고 글의 각 부분을 '조금' 이해한다. 그럼 글 전체에 대한 이해가 늘어난다. 이 늘어난 이해를 가지고 글의 각 부분을 조금 더 이해한다. 그럼 또 전체에 대한 지식을 약간 더 얻는다... 이 과정이 '읽기'를 중단하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봤나 +_+ 라고 생각하며 무심결에 머릿속을 휙 스캔했는데, 딱 떠오르는 개념이 있었다. 이름하여 '실험자의 회귀'. (이 개념에 대해서는 예전에 블로그에 써둔 글이 있으므로 참고하시길 바람: 역사가의 회귀.) 실험자의 회귀 또한 이런 식의 루프 아니었던가? 전체 → 부분 → 전체 → 부분 → ... 으로 계속되는 해석학적 순환과, 이론 → 실험 → 이론 → 실험 → ... 으로 계속되는 실험자의 회귀를 비교해보면 무언가 흥미로운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둘의 구조는 한 쌍의 개념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구조라는 면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차이점은 무엇일까? 눈에 띄는 차이점은 둘의 '목적'이다. 해석학적 순환은 텍스트의 '이해'를 그 목적으로 한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부분을 이해해야 하고, 부분을 이해하려면 전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실험자의 회귀는 '설명'에 그 목적이 있다. 이론을 설명하려면 실험이 있어야 하고, 그 실험을 설명하려면 이론이 있어야 한다. 두 개가 어떻게 다를까? 엄밀하게 들어가면 둘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설명'을 '자연에 대한 이해'로 대치한다면 두 경우가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다. 즉 이론을 자연에 대한 통일적 이해, 실험을 자연의 일부에 대한 이해라고 대치시키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해석학적 순환에서 사용한 '해결책'을 실험자의 회귀로 끌고 올 수 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선이해'가 있다. 상식적 실재론/인식론이 그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고 만지는 '그대로'를 초기값으로 사용하자. 그럼 '작업'을 반복함에 따라 자연히 이론과 실험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된다. 어라. 써놓고 보니 과학자들이 하는 얘기랑 똑같아졌네 데헷 '-^ 과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물에 대한 '상식적' 관찰에서 시작해서 자연에 대해 모델을 세우고 그 모델을 '실험'을 통해 점차 수정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라고. 따라서 여기까지 사용한 논증을 이용한다면 과학사회학자들을 '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충분히 '닫힌 체계'를 만들 수 있는데, 거기에 과학자 사회를 끌고 들어올 필요가 있는가? 님들의 문제점은 '변증법적' 발전이 없다고 가정한데 있음!" 과기철 보고서에 잘 써먹으셈 ㅇㅇ 하지만 여기에서 멈춘다면 "아니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뭐 이리 주절주절 써놓았음?" 밖에 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드니까 쟤를 한 번 까보자. 왜? 난 바나나니까~ 후후. 앞에서 제기한 논증을 까는 방법으로 두 가지 정도를 찾았는데, 둘이 완전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분리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1) 두 개념의 유추가 타당한가? 요건 말꼬리를 잡아서 반박하는 컨셉으로, 공격이 강력한 대신 사회구성주의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냥 나 병신? 그럼 너도 병신 ㅇㅇ 하고 끝내는 타입 -_- 과연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설명'을 '자연에 대한 이해'로 대치시킬 수 있을까? 이야기를 해석학에서 시작했으니 여기서도 해석학을 들고 나오자면, 해석학에서 '이해'라는 말은 학자에 따라 다 다르게 '이해'된다. 그럼 과연 자연과학의 '이해'가 해석학의 '이해'로 전이될 수 있을까?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지금은 반박 중이니 전이될 수 없다고 얘기를 해야겠다. 왜? 자연과학은 본질적으로 주-객 구조를 가정하고 '대상'을 '분석'해서 이해하는 반면, 하이데거-가다머로 이어지는 해석학에서는 '현상학적 이해'를 들고 나와 자연과학 식의 이해는 참된 이해가 아니라고 반박하기 때문이다. 아... 이게 뭔 소린지 설명하려면 현상학에 대해 한바탕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무리이므로 그냥 그렇다고 치자.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독자(혹은 해석자)가 일방적으로 수많은 질문을 텍스트에 퍼붓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제기하는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359쪽) 책에 나온 해석학의 주요 명제 중 하나이다. 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이해'는 자연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퍼붓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이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두 구조의 '유추'는 그 전제가 틀렸으므로 불가능하다. 보다시피, 이 반박은 아예 '판'을 없애버리는 반박이다. (2)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외부 요인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가정이 타당한가? 요건 '실험자의 회귀'가 '해석학적 순환'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한 다음 그 세부적인 메커니즘이 잘못됐다고 행패를 부리는 컨셉이다. 사실 이건 반박이라기보다는 사회구성주의의 '옹호'라고나 볼 수 있다. 해석학적 순환에 사회구성주의가 낑겨들어갈 수 있음을 보이기 때문이다. A: "너 병신" B: "즐! 난 짱, 넌 병신" A: "아냐 난 병신 아냐... 나도 짱!" 뭐 이런 타입이랄까 -_-; 얘를 택하면 이론 → 실험 → 이론 → 실험 → ... 의 순환고리를 '닫힌 체계'로 합리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합리화된 체계는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리면 된다. 정말 니들이 이론만 갖고 실험 결과를 해석하냐? 뭐 이런 거지. 뭐 <골렘> 등의 책에서 제시하는 예를 들고 나오면 괜찮을 듯 싶다. 그렇게 되면 저 고리는 이론 + 사회 → 실험 → 이론 + 사회 → 실험 → ... 으로 수정되고, 이 고리가 '닫힌 체계'를 이룬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결국 이 반론을 택하면 문제는 "이론/실험의 순환고리와 (이론+사회)/실험의 순환고리 중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되는데, 이건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휴. 길고 긴 글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글이 길어지면서 글의 주제가 불명확해졌는데, 간단하다. 해석학적 순환 개념을 이용해 실험자의 회귀에서 '반드시' 외부 요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 보다시피 외부 요인 없이도 실험자의 회귀는 문제 없이 잘 굴러갈 수 있다. 현실적으로 외부 요인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든 '논리적'으로 과학자들의 사고가 딱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 아씨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다들 스크롤 할 듯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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