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히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뿌리와이파리.

'문명'의 영원한 고향, 로마. 초등학생 때 <로마인 이야기>를 잡은 이후로, 항상 나에게 로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렸을 때는 로마의 찬란한 영광에 관심이 많이 갔는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로마가 어떻게 쇠퇴했는지'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 분야를 다룬 대표적인 책으로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이 있는데, 번역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고 분량도 장난이 아닌지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라딘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고, 제목에 꽂힌 나는 이 책을 낼름 구입하고 말았다. (기번의 책은 언젠가 읽을 기회가 있겠지 -_-)y~)

기번은 자신의 책에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을 '기독교의 융성'으로 진단한다. 내세지향적인 종교가 로마 제국을 사로잡으면서 사람들이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고, 기독교 윤리가 사회로 흡수되면서 건전한 로마 시민 윤리가 멸종되었다는 것이다[1]. 저자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기독교가 흥기한 것이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이라면, 어째서 기독교가 훨씬 강력하게 발호했던 동로마 제국은 쉬이 멸망하지 않았는가? 저자는 기번 이후 2세기가 넘는 기간 축적된 역사학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다른 원인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원인은 무엇인가? "훈족과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과 주고 받은 영향"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그 외에도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2], 이 책의 입장은 그 중에서도 '외부 요인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 책에서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시간 순으로 샅샅이 훑어온다. 사료들이 분석되고 인과관계가 짜맞춰지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큰 그림이 차근차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연구 방식'이 <로마인 이야기>와 이 책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시오노 씨는 기본적으로 '소설가'고, 적지 않은 부분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곤 한다. 반면 이 책은 역사가에 의해 쓰여진 만큼 역사학적인 방법론을 철저하게 사용해서 합리적인 결과를 내놓고 있기에, 읽기에 조금 지루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다. (저자는 사료 부족으로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학자'다.)

사실 원인이 저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저자가 저것'만'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원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저자의 논리는 진화론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이렇다. 로마 제국은 특정 '환경'에 잘 적응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훈족의 이동과 그에 따른 게르만족의 세력 변화로 인해 그 환경이 심하게 변해버렸다. 로마 제국은 자신의 시스템을 가지고 어떻게든 그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경'과 '시스템'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주고 받기에, 로마 제국이나 만족이나 서로에 의해 어느 정도씩 시스템의 변화를 경험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면, 결국 이렇게 드러난 '시스템의 변화'는 '시스템의 붕괴'와 상관관계에 있게 된다. 많은 사학자들이 실수한 것은 이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한 것이다. 뭔 소린고 하니, 환경의 변화가 시스템의 변화를 초래했고, 동시에 그 환경의 변화가 시스템의 붕괴에도 기여했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의 변화가 시스템의 붕괴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 로마의 시민 윤리가 붕괴되었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 책에서 저자는 로마의 시민 윤리가 '특별히 더' 악화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1세기에도 어느 정도의 비리와 부패는 존재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사료적인 증거가 남아있다.) 이는 '건전한 시대를 살아간' 로마인의 의식 속에도 편법에 대한 욕구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경우에는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해 이런 문제들을 솎아냈다. 문제는 환경이 변화하면서 이 욕구가 분출될 기회가 늘어났고, 시스템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만 본다면 4~5세기의 로마 제국에선 훨씬 많은 비리와 부패가 자행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 비리와 부패 '때문에' 로마 제국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단순히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료와 합리적인 사고를 이용해 역사를 '재구성'하는 저자를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역사학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게다가 학술적인 이야기로 지루함을 잔뜩 선사하는 대신 역사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진행시켜 나 같은 늅늅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니 얼마나 좋은가? 비록 책 두께의 압박으로 인해 갖고 다니기에도 지하철에서 들고 읽기에도 빡센 책이지만, 이 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배웠다.
by 로보스 | 2009/06/12 16:57 | |감상| | 트랙백 | 핑백(2)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lovos.egloos.com/tb/234449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독서 리스트. at 2009/06/12 16:58

... 랄 네루, 세계사 편력, 일빛. 김한종, 역사왜곡과 우리의 역사교육, 책세상. (1/30-2/2) [감상문] 피터 히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뿌리와이파리. (6/2-6/10) [감상문] 아트 슈피겔만, 쥐, 아름드리미디어. (3/23-4/1) [감상문] 노태돈,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집문당. 마크 스틸, 혁명만세, 바람구두. 박홍규, 아나키즘 이야기,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존 더비셔.. at 2009/06/16 16:18

... 슬프다 ㅠㅠ 나는 이 책으로 수덕 인증을 해버린 것 같다... 아 왜 이런 책이 재밌지 ㅠㅠ 막 읽는데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lt;로마제국 최후의 100년&gt;도 재밌긴 했지만 이 정돈 아니었단 말이지. 이 책에서는 '소수'에서부터 시작해 '소수 정리'를 거쳐 '리만 가설'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 ... more

Commented by newisdom at 2009/06/15 22:24
로마제국 쇠망사http://blog.aladdin.co.kr/mramor/2300415 이 번역판은 괜찮다고 하던데, 서점에 가보니 책을 비닐로 싸놨더라고;;;학교 도서관엔 아직 없고-.-;;그래서 확인은 못했는데....근데, 정모는 정말 부지런하구나. 부럽!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6/16 09:03
newisdom 누나// 왜 헷갈리게 닉네임 바꿔요 ㅋㅋ 저 책 괜찮아 보이네요! 그래도 분량은 압박이라는 ;ㅁ;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즐겁게 살아야죠. :)
by 로보스
Calendar
메모장
카테고리
|소개|
|일기|
|감상|
|과학|
|잡념|
* 홈페이지 ('02-'03)
* 네이버 블로그 ('05-'06)
최근 등록된 덧글
낙동강 방어선 결사항전..
by _tmp at 00:31
안녕하세요 요즘 한가해..
by 김은수 at 00:22
난 이런 것만 보면 전국 ..
by 긁적 at 01/06
허허허허허허허.
by 긁적 at 01/06
부산의_위엄.jpg
by 소시민 at 01/06
허허허 좋군? ㅋㅋㅋ
by Yuki37 at 01/06
허허허... 완전히 눈밭..
by 매치어 at 01/06
barb님// 메일로 보내드..
by 로보스 at 01/06
앗 정말 감사합니다 이글..
by barb at 01/05
비밀글님// 아 도와드리고..
by 로보스 at 01/05
wolga님// 감사드립니다..
by 로보스 at 01/05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쓰시..
by wolga at 01/04
귀염둥이님// 걱정해주시..
by 로보스 at 12/30
끝나지않은2000년의 전쟁-..
by 귀염둥이 at 12/29
moomo님// 안녕하세요..
by 로보스 at 12/28
독서리스트 책들은 어떻..
by moomo at 12/28
비밀글님// 네, 저도 번..
by 로보스 at 12/25
귀염둥이님// 말씀은 감..
by 로보스 at 12/25
이책은 이슬람과 유대인..
by 귀염둥이 at 12/25
ExtraD님// 어이구 Extr..
by 로보스 at 12/22
최근 등록된 트랙백
네이트온 사칭 - 메신저..
by ★ Stella et Fossilis
2007 - Gerhard Ertl
by 한글
Scheme으로 루저 인증..
by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루져 테스트 [asp.net]
by 緣
루저코드 - 파스칼 버전
by Divine Power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