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피터 마르틴 외,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원제는 die Globalisierungsfalle. (역시 독일어는 합성어 간지 -_-)b) 많은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선(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계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해악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게 원래 우리 아가씨가 예전에 국어 선생님인가 누군가한테 추천을 받았다고 나한테 물어봤던 책이라서 기억 속에 있었는데, 지난번에 국방부 선정 '이 시대의 양서 리스트'에 보니 이 책이 당당하게 뽑혀 있길래 냉큼 구입을 결정했다.

이 책은 세계화로 포장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서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적시하여 실제로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방부의 평가에 따르면 '반자본주의' 도서라는데, 이 인간들 난독증 아닌가 -_- 이 책의 어디에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내용이 있다는 거지;;;) 저자들은 처음에는 각 장 별로 상품 시장의 세계화, 금융 시장의 세계화, 노동 시장의 세계화 등을 다루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실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풀어놓으면 잘 사는 놈들은 더 잘 살게 되고 못 사는 놈들은 더 못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이 세계를 덮고 있는 이유는? 잘 사는 놈들이 권력과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책을 읽어가면서 <풍요한 사회>의 주장이 계속 오버랩되었다. 두 책 모두 문제점 인식에 있어서는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는 부익부 빈익빈의 세계가 될 뿐이고, 이런 세계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럼 여기서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두 책이 이야기하는 바를 공통점만 뽑아서 얘기하자면 "세상이 달라졌어 ㅉㅉㅉ"이다 -_-; <풍요한 사회>는 우리가 '풍요한 사회'가 되었고, 여기에 '빈곤한 사회'의 패러다임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고, 이 책은 우리가 ''금융 위주의 무역'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상품 위주의 무역' 패러다임을 적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리카르도에 대한 분석!)

오케이, 문제점은 알았다. 자, 그럼 대안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잘 사는 놈들이 자신의 것을 양보하든지 못 사는 놈들끼리 단합해서 '혁명'을 일으키든지. 이 책에서는 이 두 대안을 미국과 유럽 연합의 경우에 대입해서 설명한다. 슈퍼 파워를 지니고 있는 미국이 자기 것을 양보하면서 세상을 바꾸든지, 유럽의 국가들이 하나로 뭉쳐서 미국을 겐세이하든지 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아직 유로화 통합이 정식으로 이뤄지기 전에 나왔다.) 저자들은 미국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자기 것을 양보하지 않을 것 같으니 유럽 국가들 간의 단합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데, 음... 과연 이게 쉬울까 -_-

저자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힘 없는 다수가 뭉쳐서 무슨 일을 하려면 항상 발목을 잡는 것이 있다. 죄수의 딜레마라고 -_- 다국적 기업은 세금이 낮은 나라에서 거의 모든 이익이 나오고 세금이 높은 나라에서 거의 모든 지출이 나온 것처럼 사기를 쳐서 돈을 번다. 이걸 막기 위해 세금이 낮은 나라에서 세금을 올리려고 하면 "아 ㅅㅂ 더러워서 너네 나라에 안 있어. 나 다른 데로 옮긴다?"라고 협박을 해서 중단시킨다. 이 상황에서 이 기업에 적절한 세금을 물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죄수의 딜레마다. 다 같이 세금을 올린다면 정의를 구현할 수 있겠지만, 나만 세금을 올리면 덤테기를 쓰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존내 쉬운 내쉬 평형, 즉 모두 세금을 올리지 않는 쪽으로 평형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풍요한 사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세금을 많이 내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만, 나만 세금을 많이 내면 공공의 이익도 못 받고 나 혼자 독박을 쓰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존내 쉬운 내쉬 평형, 즉 세금을 다 같이 안 내는 방향으로 평형이 이동하게 되고, 결국 갤브레이스가 묘사했듯 개인의 집은 깨끗하고 풍족한데 공공 시설은 개쓰레기가 되는 상황이 닥치는 것이다. 문제는, 그나마 개인이 내는 세금이라면 정신 박힌 국가가 일률적으로 때리면 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다국적 기업이 내는 세금이라면 그런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아 결국 저 망할 죄수놈들 때문에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물리칠 수 없는 건가! 우리 목사님과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해봤는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70-80년대의 민주화 항쟁은 어떻게 일어났겠어요?" 아, 그렇다. 사실 데모 역시 죄수들이 지배하는 세상 아니겠는가. 떼로 몰려가면 뭔가 관철시킬 수 있지만 나 혼자 가면 얻어터지고 끝나는. 하지만 학생들은 존내 쉬운 내쉬 평형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목사님께서는 그 원인이 '사상화'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단어는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사전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주길.) 당시 운동권 사람들이 하는 주요 활동은 데모가 아니라 '공부'였다고. 모여서 책 붙들고 열라 파고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확신이 생기는 거라고. 갑자기 빛이 한 줄기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 약한 자들이 무조건 존내 쉬운 쪽으로 달려간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어떻게 일어났겠는가?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겠는가? 68 혁명은? 6월 항쟁은? 그래, 희망이 보인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언젠가 세상도 바뀌겠지. 우석훈 박사의 말처럼,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이런 식으로 독후감을 포스팅하는 행위부터 누군가를 설득하는 첫 스텝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신자유주의 그거, 아주 못되먹은 놈이더라고요!
by 로보스 | 2009/05/08 18:00 | |감상|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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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 [감상문] 경제학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풍요한 사회, 한국경제신문. (3/24-3/27) [감상문] 한스 피터 마르틴 외,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5/1-5/5) [감상문] 도모노 노리오, 행동 경제학, 지형. 역사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한길사.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한길사.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제프 일리, The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EBS 지.. at 2009/05/19 16:44

... 씨도 무척 좋아하는 책.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우울해졌다. 요새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빌어먹을 죄수기 때문에 세상에는 희망이 없어!"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1], 마치 그것이 현실화된 것을 보는 듯한 느낌. 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을 도구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그 잘난 놈의 생산을 위해, 효율만 좋다면 인간의 삶 따위는 개한 ... more

Commented at 2009/05/09 03: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5/09 23:10
비밀글님// 와 정말 감사합니다 ^^ 이런 답글이 활력이 돼요 :D
Commented by Bloodstone at 2009/05/10 10:22
존내 쉬운 존 내쉬(ㅋㅋㅋ;;) 평형을 깨는 방법이 '공부'라니, 학문은 사회와 분리되어 있으며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흥미롭기 그지없습니다; 세계화의 영향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논리적인 지적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예전에 제가 목격한 합성어간지(...) 중에서는 무려 botanic immunological biotechnology;를 한 단어로 줄여놓은 것도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5/11 08:46
Bloodstone님// 저 역시 학문이 사회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하는 학문이라면 어느 정도 결합될 수 밖에 없겠지요. 사회과학 쪽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학파가 좀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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