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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과 신학에 대해 이런저런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 (언제 한 번 자세히 쓸 날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본회퍼가 직접 쓴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대부분 감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읽다보면 본회퍼의 신학과 철학이 잘 드러나더라. 다른 부분도 좋았지만, 나는 특히 "성인된 세계"에 관한 메시지가 감명 깊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메시지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고대-중세 사회는 인간이 자연 앞에 굴복하는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신의 영역이었고, 모든 해결책을 신으로부터 찾았다. 곧 '종교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다 13세기부터 인간이 자연에서 자율성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르스 노바(ars nova)와 르네상스,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자율성은 점점 커져 갔고, 그에 반비례하여 신의 영역은 점점 축소되어 갔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 죄, 고난, 허무, 불안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을 찾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인된 사회(成人이 된 사회, die mündig gewordene Welt)"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남아있는 영역을 신의 영역으로 주장한다. "우주가 왜 생겼는지 알아? 그게 다 신의 섭리야."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알아? 그게 다 신의 섭리야." 그럼 우주의 생성 원인, 생명의 유지 메커니즘이 낱낱이 밝혀진다면 우리의 신은 자신의 영역을 축소해야 하는가? 혹은 이런 얘기도 한다. "뭔가 공허하지? 신이 필요한 거야." "너 죄책감 들지? 신이 필요한 거야." 그럼 공허감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이 필요하지 않은 건가? 이와 같은 논증은 자꾸자꾸 기독교의 지평을 줄여나갈 뿐이다. 본회퍼는 지금까지 기독교는 종교의 껍질 안에서 '해결책'으로서의 신(deus ex machina)을 주장해왔지만, 이제 '무종교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종교의 껍질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의 껍질을 벗어던진다면, 기도도 묵상도 예배도 필요없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본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경건생활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본회퍼가 이야기하는 "종교의 껍질 벗어던지기"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기독교를 덮어쓰는 대신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빌라도가 재판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한 말, 요 19:5)"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타인을 위해. 예수께서는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 받으러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사실 신을 상실한 세계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세계의 무신성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종교적으로 가려 버리거나 신성화해서는 안된다. 그는 세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고 거기서라야 신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 그는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릇된 종교적 속박과 장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일정한 양식으로 종교적이거나 또는 어떤 방법론에 근거해서 무언가(죄인이라든가 회개한 자라든가 성도라든가) 자기를 꾸며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든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거룩한 삶'과 '세속적 삶'을 구분한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앉아있는 것은 '거룩한 삶'이요, 직장, 학교,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은 '세속적 삶'이란다. 본회퍼는 이와 같은 구분을 과감히 거부한다. 종교적 행위를 하는 '거룩한 삶'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타인을 위해 고난당하는 삶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말처럼 타인을 위해 고난당했고, 마침내 죽음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였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절대를 요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 죽으라고 하신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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