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이학사.

긁적 형님이 읽어보고 러셀의 평가를 바꿨다고 말한 그 책[1]. 나 역시 이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 러셀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좀 과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느낌? 나대다가 비트겐슈타인한테 발리기나 하고 ㅉㅉ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나와 진영(?)은 다르지만 러셀 역시 한 명의 천재로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실재론과 인식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즉 "진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이 책의 주제라고 해도 될 것이다. 다분히 고전적인 철학의 관심사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형 떡밥이다. 러셀은 이 떡밥을 물고 무슨 소리를 했는가?

러셀은 실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논의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러셀은 반대자들을 의식하며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데, 절대로 섣불리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좀 놀랐는데, 러셀이 기독교에 가한 비판을 볼 때 자신과 반대되는 사상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공격을 퍼부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셀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사실 나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어보지 않았다 -_-;; 만약 러셀이 그 책에서도 이 책과 같은 태도를 갖고 있다면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공격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럼 이렇게 신중하게 여러 관점들을 살펴본 후 러셀이 받아들인 관점은 무엇인가? 의외로 싱겁다 -_- "우리가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들 중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녀석을 믿자." 난 또 뭔가 대단한 기준이라도 제시할 줄 알았다. 러셀은 우리의 본능적 믿음 체계에서 모순을 밝혀내고 '의미 있는' 믿음들을 골라내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아마 러셀은 이 작업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석판명한 체계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이런 식으로는 결국 개인의 신념 문제로 수렴하는 것 아닌가 싶다. 과연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믿음 체계가 존재할까? 난 회의적이다. 이후 러셀이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흥미로운 근거를 제시하지만, 그리고 그 근거들이 제법 설득력이 있지만, 애초에 그 기초가 개인의 신념에 있는 이상 러셀의 근거가 큰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걸로 러셀 병신 인증 ㅇㅇ?

이후 러셀이 전개한 논증에서 흥미로운 이야기 몇 가지를 간단히 메모해둔다. 우선 러셀은 '보편자'의 정의를 확장했다. 일반적으로 개별자-보편자 논쟁에서 보편자는 하나의 '명사'로 여겨지는데, 러셀은 동사도 보편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아가씨를 사랑한다."에서 아가씨는 특정 개별자일지라도 사랑한다는 행위는 보편적이니까. 이 얘기는 결국 '관계'가 보편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걸 찾아낸 걸 볼 때 러셀이 그저 병신은 아님을 알 수 있다 ㅋㅋ)

러셀은 이 '보편적 관계' 개념을 사용해서 열심히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그 와중에 칸트 횽은 이걸 간과했는데 난 생각했으니 난 좀 짱인듯? 식의 발언도 등장 ㅋ) 뭐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이 중에 '진리'에 관한 흥미로운 설명만 키핑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중 '진리'는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러셀은 앞서 설명한 보편적 관계 개념을 여기로 끌고 들어온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로보스는 긁적 형이 제정신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포함된 '요소'들은 무엇인가? "로보스", "긁적 형", "제정신이다", 그리고? 그래, "~라고 믿는다"가 있다! 이 "~라고 믿는다"는 러셀의 '보편적 관계' 중에서도 특별한 예인데, 이 녀석을 통해 진리/거짓이 판명나기 때문이다. 러셀의 논리를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A는 P라고 믿는다."의 형태로 고쳐쓸 수 있고, 이 때 P에 대응하는 실재물이 세상에 존재하면 그 지식은 진리, 아니면 거짓으로 판명난다. (이 설명에서 살짝 눈치를 챌 수 있는데, 러셀의 주장은 결국 논리실증주의와 연결된다. 포퍼의 반증주의를 써먹으면 러셀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데, 어차피 핵심을 반박하는 건 아니니까 넘어가자.)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과학으로 얻는 지식이 확실한 지식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논지가 마음에 쏙 들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러셀은 칸트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니 한 번 들춰볼 가치는 있다. 문제가 있다면, 철학 책이라서 그런지 술술 읽히지 않는다는 점. 긁적 형은 이걸 번역의 문제라 했는데, 난 내가 읽어본 다른 철학 책들에 비해 그리 나쁜 번역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서 판단을 보류한다. 끗.
by 로보스 | 2009/04/16 14:45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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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긁적 at 2009/04/16 23:33
ㅋㅋㅋ 조아조아. 적절하다~ 적절하다~

이게 정상인의 독후감이지. 내 독후감은 막장임 ㄱ-....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17 08:41
긁적 형// 과연 정상인의 독후감일지는 ㅋㅋㅋ
Commented by 페스츄리 at 2009/04/19 12:40
우리의 커먼센스를 믿자는 러셀의 주장은 그리 틀려보이지는 않네요. 사실 솔직히 우리가 산수문제를 풀거나 통계학적인 생각을 돌아보아도 사실..이런 상식의 포착과정을 주재하는 성리학의 용어대로 하자면 "良知" "良能"이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끌어주지 않으면 우리가 간단한 사칙연산 하나 풀수 있을까요? 전 개인적으로 "직관주의"즉 "시비지심"을 하늘에서 분유받아서 우리는 직관적으로 세계를 기초적으로 구성하고 그 구성된 세계의 "미언대의"를 꼼꼼히 찾아본다고 생각해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19 21:58
페스츄리님// 단순히 '상식'이 아니라서 문제인 겁니다 ^^; 러셀은 상식 중에서 '말이 되는' 애만 골라서 쓰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되는'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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