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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잡은 과학철학 책. 화려한 필진 -- 포퍼, 쿤,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 -- 에 반해서 냉큼 샀는데, 확실히 쉬운 책은 아니더라. 나중에 시간 봐서 천천히 읽으면서 공부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놓고 한 가닥 하는(!) 과학철학자들이 벌이는 토론을 정리해둔 책이다. 토론이라지만 말로 싸운 걸 채록한 게 아니라 각 사람의 주장이 담긴 논문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각 글 안에서 깔끔하게 논지가 정리된다. 일단 목차를 통해 어떤 글들이 실렸는지 살펴보자. 발견의 논리인가 탐구의 심리학인가? (토마스 S. 쿤) '정상과학'에 대한 반론 (존 왓킨스) 정상과학과 혁명적 과학 사이의 구분은 타당한가? (스테판 툴민) 정상과학과 과학혁명 그리고 과학사 (L. 퍼스 윌리엄스) 정상과학과 그 위험성 (칼 포퍼) 패러다임의 성질 (마가렛 매스터만) 반증과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의 방법론 (임레 라카토슈) 전문가를 위한 위안 (폴 파이어아벤트) 비판에 답하여 (토마스 S. 쿤) 일단 쿤이 제일 앞과 제일 뒤에서 전체 논쟁을 '감싸고' 있다. 아무래도 논쟁의 주제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기 때문에 쿤에게 도입과 마무리를 맡긴 것일게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뭐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뛰어넘겠다. 나머지 글들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이 글들은 매스터만의 글을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분량으로도 대충 그렇고, 글들의 성질도 그렇다. 이것을 기준으로 글들을 정리해보겠다. 전반부의 글들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상과학'의 개념을 비판한다. 포퍼의 '반증'이 결국 쿤의 '과학혁명'에 대응한다고 봤을 때, 쿤이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은 정상과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정상과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짤막짤막한 비판들이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다. 한편 매스터만의 글을 읽으면서 일종의 '쉬는 시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일단 매스터만은 '쿤 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닐까 싶다. 매스터만 이전까지 쿤에 반대하는 목소리만 듣다가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ㄳ"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나오니 분위기가 환기되는 것이다. 또한 주제 자체도 확 달라진다. 매스터만은 자신의 글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분석한다. (<과학혁명의 구조> 후기에 보면 쿤이 자신의 '패러다임' 개념이 스물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게 매스터만이 이 글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다.) 매스터만은 이 작업을 통해 쿤이 '발견해낸' 패러다임의 중요한 의미를 찾아낸다. 이어 라카토슈와 파이어아벤트의 글이 이어진다. 이들의 글은 또 완전 색다르다. 일단 분량이 장난 아니다 ㄷㄷㄷ 그리고 이들은 단순히 쿤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라카토슈는 '연구 프로그램'이라는 아이디어를 창안한 사람이고, 파이어아벤트는 소위 과학철학의 '아나키즘'을 주창한 사람이다. 여기 실린 글들에서도 이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라카토슈는 쿤의 비판처럼 반증주의가 무조건 틀려먹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세련된' 반증주의를 설명한다. 사실 읽다보면 쿤과 포퍼를 적절히 짬뽕해놓았다는 느낌이... -_-;; 그러면서 그걸 좀 더 형식화하여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 개념을 들고 나와 쿤을 비판한다. 라카토슈는 참 글을 잘 '짜놓아서', 읽으면서 '라카토슈님 짱인듯 ㅠ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흥미로운 것은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이다. 흔히 포퍼, 쿤,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를 그 주장의 유사성에 기반을 두고 '파이어아벤트 - 쿤 - 라카토슈 - 포퍼' 순으로 분류하곤 한다. 헌데 여기 실린 파이어아벤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포퍼의 향기를 느꼈다 +_+ 사실 말하는 것만 보면 파이어아벤트가 가장 과격하다는 생각이 든다. 포퍼는 과학자라면 잘 짜여진 과학적 방법론(반증을 위한!)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파이어아벤트는 점성술이나 원시 종교까지 전부 과학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어느 면에서 둘이 비슷하다는 것일까? <쿤/포퍼 논쟁>에서 다룬 이야기가 그 힌트가 된다. 포퍼가 반증주의를 주장했던 것은 과학자 사회를 '열린 사회'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과학자 개인이 각자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권위에도 굴종하지 않고 각자 민주적으로 연구를 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포퍼는, 뉴턴과 같은 거대한 위인이 있다 해도 그 위인의 권위에 압도되지 않고 그의 업적을 뒤엎는 일이 과학자 사회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보았다.) 반면 쿤은 어떠한가? '패러다임'이라는 거대한 권위가 과학자 사회를 뒤덮고 있다. 패러다임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과학자 사회에서 축출되고, 과학 연구에 참여할 수 없다. 이는,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닫힌 사회'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프레임에서 볼 때, 파이어아벤트는 포퍼 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 사회를 지배하는 어떠한 규칙도 인정하지 않고 '민주적'으로 모든 이가 대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겉보기에는 정반대인 두 사람이 실상 원하는 바는 동일하다니. (파이어아벤트에 대해서는 사실 그리 깊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좀 더 공부가 필요해 T_T) 어쨌든,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고, 번역도 나름 괜찮다. 책 뒤에 붙어있는 역자 해제도 도움이 제법 되었고. 과학철학 분야에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일 듯 싶다. 아직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좀 더 공부하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결심만 생길 뿐이지만. :) ...아. 짧게 쓰고 끝내려고 했는데 버닝해버렸다... 이런 글 따위, 아무도 읽지 않을 거야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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