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볼, <화학의 시대>, 사이언스북스.

내가 앞서 투덜거렸듯이[1], 화학 분야에는 변변한 교양서가 없다는 느낌이다. 필립 볼의 이 유명한 '교양서'도 대중교양서로서의 자격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책이 되겠지만, 그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덥석 잡기에는 어려운 책이기 때문이다. (호프만의 책도 비슷한 느낌.)

이 책에서는 '최신' 화학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헌데 조금 에러로 보이는 것이, 그 '최신' 화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기초 지식을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화학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까지 내려가서 흑체 복사와 광전 효과를 설명하는데, 이런걸 보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누가 그걸 술술 다 이해하며 따라가겠는가? (나도 전공자라면 화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교양서'에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1장부터 4장까지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런 '기초 지식'의 수준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전공자라면 지루하고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난해한 수준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그것도 무언가 참신한 설명이면 모르겠는데, 거의 물리화학 교과서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선 접경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나 좀 새롭게 배우는 게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쓸모없는 책은 아니다. (1994년 당시 기준으로) 화학의 최신 분야들을 훑는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작업인지! 그것도 어느 한 분야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합성화학, 물리화학, 나노화학, 고분자, 생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주제들을 선정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다. 물론 이 책이 발매된지 15년이 지난 지금 보면 뻘타라고 생각되는 말들도 종종 있지만 (풀러렌에 대한 열광적인 태도라든지?) 흥미롭고 유망한 분야를 선정한 저자의 식견은 인정할 만 하다. 특히 내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화학동역학에 대한 얘기였는데, 물리화학 3를 들을 때 무척 흥미를 느꼈지만 깊게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던 것을 어느 정도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등장한다.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조금 더 쉽고 흥미롭게 써서 일반인들에게도 '화학의 시대'가 어떠한 것인지 소개해줬다면 좋았을텐데.

@ 그러고보니 이 책의 저자가, 내가 번역해서 소개하려고 했 '화학자가 궁금해하는 것들'의 필자다. 저 시리즈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한 분들은 그냥 이 책을 보시길 -_-;
by 로보스 | 2009/03/30 19:00 | |감상| | 트랙백 | 핑백(3)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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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Lovos dixit : 폴 .. at 2010/04/02 02:23

... 세상에는 과학에 관한 교양서가 지천으로 깔렸는데, 화학 분야에는 변변한 책이 없어서 &lt;화학의 시대&gt; 같은 책이 "좋은" 화학 교양서로 추앙받고 있다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저 책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 more

Linked at Lovos dixit : 크리.. at 2011/05/15 02:32

... 서들은 그렇게 없는 걸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화학 교양서들은 왜 그렇게 다들 어렵고 재미없는 걸까? (&lt;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gt;, &lt;화학의 시대&gt; 등) 내 "눈"이 너무 높은 걸까? 이 책은 제법 호평을 받았기에 내심 괜찮은 화학 교양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결 ... more

Commented by AFHR at 2009/04/08 03:22
그런 의미에서 교양화학시간에 신나게 나와 대는 오비탈 적분 문제들이 슬픕니다ㅠㅠ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08 09:49
AFHR님// 교양화학에 무슨 오비탈 적분을 하나요 ㄷㄷㄷ
Commented by 읭?? at 2010/06/21 00:32
읭?? 일반화학에 오비탈 적분 나오는데요???

양자역학도 나오는데 일반화학에;;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0/06/21 01:30
읭??님// 저도 일반화학 들어봤답니다.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정량적으로 "적분"을 하느냐는 질문이에요. 오비탈 적분이라는 개념이 정성적으로 다뤄진다는 거는 저도 알죠.
Commented by transitional at 2011/10/06 17:07
2011년 노벨 화학상이 준결정의 발견자 셰흐트만에게 돌아갔더군요. 소개해주신 이 책에 설명이 잘 되있던 기억이 나서 다시 와보았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11/10/08 06:07
transitional님// 아 그랬군요. 지금 그 책이 제 곁에 없어서 확인해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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