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페터 베크 보른홀트 외, <알을 낳는 개>, 인디북.

Seldon님의 블로그에서 이 책 이야기가 몇 번 언급[1]되었는데, 책 전체에 대한 소개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소개해주신 내용만으로도 재미있어 보여서 질렀다. 이 책의 타겟은 비합리적인 추론을 하는 '과학자들'이다. 물론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의 이야기도 실려있지만, 주목표는 과학자들의 비합리적인 추론을 지적하는 데 있다. 언뜻 들으면 일전에 소개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과 흡사한 책 같은데, 어떨까?

이 책에서는 실제 과학자들의 논문에 자주 등장하는 여러 오류들을 지적한다. 특히 통계학을 오해해서 만들어지는 오류들을 많이 지적하는데, 상당히 유익하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를 통계 처리해서 영 가설[2]이 성립할 확률을 계산한다. 예를 들어 약 A와 약 B의 효능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두 약의 효능이 같다'는 명제를 영 가설로 두고 영 가설이 성립할 확률이 매우 작다는 걸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5 %보다 작으면 영 가설을 '기각'하는데, 영 가설의 기각이 반드시 대립가설의 성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립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통계 처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부분이 고려되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검토해 본 후에야 대립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영 가설을 기각한 것이 곧 대립가설의 성립이라는 비논리적인 추론을 거쳐서 결론을 내린다. 이에 대한 많은 설명과 풍부한 예가 소개된다.

그 중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어지간한 샘플 수로는 2종 오류[3]를 크게 줄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몇십 개의 샘플을 해도 10 % 아래로 줄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확통 시간에 2종 오류에 대해 배우기는 했으나 거의 용어만 짚고 넘어가는 수준으로 배워서 이런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임상 연구 등과 같이 샘플 수를 크게 늘릴 수 없는 경우 단순히 나온 통계적 결과를 덥석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별 생각 없이 통계 결과를 믿는다는 지적을 한다.

데이터를 일단 얻어놓고 그걸 잘 짜맞추어서 사기 치는 법도 소개한다. (이건 왠지 학부 보고서 쓸 때 유용할 것 같기도... 쿨럭 -_-) 그래프의 y축 스케일을 바꿔서 변화의 크기를 과장하거나 깎아내리는 기초적인 스킬부터, 데이터 세트를 다르게 묶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고급 스킬까지 다양한 스킬을 소개한다. 꼭 사기 스킬 뿐 아니라 고의가 아닌 변형, 예를 들어 인용에 재인용에 재재인용을 거치면서 인용문의 원의가 완전 뒤집히는 경우와 같은 경우도 소개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어보니 저자들의 의도를 알 것 같다. 지금 저자들은 논문의 필자들보다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논문을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과학자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이지만 실천이 잘 안 되고 있는 듯 하다.

여기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과학자의 상과는 달리, 과학자들은 많은 경우 선행 논문을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워낙 많은 수의 논문이 발행되는 과학계다보니 각 논문을 꼼꼼하게 따져서 읽을 시간도 없을 뿐더러, 남의 논문 따지느라 시간을 소모하면 이 "publish or perish"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 점을 비판한다. 특정 독자를 꼬집어서 비판한다기보다 이런 문화가 만연해있는 과학계 자체의 자정을 촉구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건 원래 저널 편집자나 리뷰어들이 해야하는 일 아닌가? -_-; 나는 이들의 직무유기라는 생각도 든다.)

이와 같이 상당히 유익한 책이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물론 저자들은 통계학의 기반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중간중간 나오는 숫자들과 그래프들은 이쪽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일지도 모르겠다. 나름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다는 -_- 나도 읽으면서 끙끙거렸으니까. 하지만 과학 연구에 참여하거나 참여할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중요한 내용을 교육하는 과목은 없지?
by 로보스 | 2009/03/19 10:49 | |감상| | 트랙백 | 핑백(3)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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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우유성. at 2009/03/19 15:56

... 적이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고대-중세 철학을 쓸모 없다 평한다. 하지만 요즘의 논쟁이 그것과 크게 다를까? 앞서 독후감을 포스팅한 &lt;알을 낳는 개&gt;에 보면 이런 예가 나온다. 6×6의 네모칸을 그리고 랜덤하게 이곳저곳에 화학공장, 원자력발전소, 목장 등을 몇 개 그려 넣는다. 자, 이제 빨간 주사위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정남구, .. at 2009/06/04 16:07

... 제목 그대로, 통계를 이용한 사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lt;알을 낳는 개&gt;처럼 학술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책은 아니고, 그리 어렵지 않은 구체적 사례들을 모아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그러다 보니 통계학 ... more

Commented by yu_k at 2009/03/19 11:13
말씀하신대로 과목이 없긴 하지만, 학부 때 랩에서 놀 때(...) 논문 읽는 법에 대해 배우면서 주워들었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졸업논문 쓸 때에는 데이터가 워낙 허접하게들 나오니까 다들 실제 저런 스킬을 한 번씩 이용해보지 않나 싶기도 해요-_-;;; 하하하....물론 그게 버릇이 되면 절대로 안 되겠죠.

좋은 책 한 권 알고가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사서 봐야겠어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19 11:17
yu_k님// 우왕 yu_k님이다 ㅠㅠ 헌데 김대수 교수님 방에서는 2종 오류나 뭐 그런 얘기도 가르쳐주시나 보죠? +_+ 저는 개별이하면서 논문 읽는 법은 배웠지만 비판적으로 읽는 법은 별로 배우지 못해서요 orz
Commented by yu_k at 2009/03/19 11:25
어릴 때(?) 하도 이상한 질문을 랩미팅 시간에 팍팍 던져서 교수님 얼굴을 굳게 만드는 바람에 사수님이 제가 사고칠까봐 미리미리 이상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 놓으셨거든요....ㄱ- '이런게 뽀록이다' 특강이랄까요....아니 근데 심지어 수동카메라 조작법까지 가르쳐줬어 이사람?!

그리고 행동실험 논문을 접하면 미친듯이 작은 개체수 n 때문에 결과 그래프에 관한 지대한 불신감이 저절로 마련됩니다. 의대 임상연구보다도 n이 더 작은 경우가 허다해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19 11:31
yu_k님// 아하. 훌륭한 교육을 받으셨군요... T_T 저는 별로 열의 없는 학부생이어서 그랬는지, 이론적인 건 열라 많이 배웠는데 논문 비판적으로 읽는 법은 못 배웠네요. 저도 그런 사수를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수동카메라 조작법도 배우고 말이죠(?).

생각해보니 분야마다 논문 읽기 커리큘럼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저런 통계적 오류를 많이 접하는 분야에서는 논문 읽기가 좀 더 빡세겠죠 ㅎㅎ
Commented at 2009/03/22 03: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23 08:47
비밀글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 많이 바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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