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고전 중의 고전! 아마 미술사 책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이 책의 첫인상은 그 두께와 무게가 심히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뭐 코팅지로 688쪽이니 말 다 했지. 들고 다니면서 볼 만한 무게가 아닌지라 집에 두고 깨작깨작 읽어나갔고, 결국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려서야 다 독파해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유쾌하고 똑똑한 교수님의 교양 미술사 강의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루하지 않도록 줄곧 농담과 위트가 등장하면서도,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매가 엿보인다. 저자는 끊임없이 미술 작품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끄집어낸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림을 초딩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린 이유가 미술 실력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그들 중에도 천재적인 화가가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형식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단아'는 등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자유로움의 상징인 그리스 사람들은 정말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했는가? 아니다. 그들 역시 '인체의 (이데아적) 미'라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고, 거기에 맞춰 모든 작품을 만들었다. 이 현상은 비단 과거의 것만은 아니다. 최근의 '사조'들 역시 이러한 경향을 띠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아무런 연관성 없어 보이는 동시대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찾아내는 저자의 능력이 심히 놀라웠다.

이 책이 주는 다른 한 가지 즐거움은 미술사 전체의 '흐름'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화가들에서부터 인상파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미술은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쭉 걸어왔다. 이를 위해 인체 해부학 지식이 동원되었고 원근법이 개발되었으며 빛의 역할이 재조명되었다. (나는 이 맥락에서 인상파를 '고전적인' 화가들이라고 해석한 저자의 식견에 경탄한다.) 하지만 인상파 이후의 화가들은 다른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을? 내 느낌을, 내 감정을! (읽으면서 철학사가 연상되었다. 이성으로 인도받던 근대 철학은 헤겔에 이르러 그 정점을 찍었고,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은 '다른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비슷해 보여서.)

원체 미술 쪽에 문외한인지라 세부적인 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큰 주제와 흐름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역시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닌게다.
by 로보스 | 2009/03/13 17:49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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