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일, <진화론 창조론 산책>, 참과학.

(뭐야 그새 새 판이 나왔네 -_-;) 이 책은 꼬깔님의 블로그에서 소개를 읽고 구입한 책으로, 창조과학 진영에서 주장하는 바와 그에 대해 진화론이 내놓는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인 중 한 명으로서 -_- 이런 떡밥은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지만, 책을 읽었으니 서평을 쓰는 게 도리라 생각하여 짤막하게 끄적거리련다.

우선 한 가지를 고백하자면, 난 중학교 때 창조과학 빠돌이였다! 집에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을 그득 담은 책들이 여러 권 있었고, 심지어 창조과학의 주장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홈페이지까지 만들어서 운영했다. 지금은 대학에 와서 먹물... 이 아니라 아세톤을 좀 먹었더니 창조과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아 이런 말 하기 조심스럽네 -_-;) 그런데 내가 창조과학 빠돌이였던 이유를 살펴보자면, 창조과학 진영에서는 끊임없이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구가 한 순간에 창조되었다는 근거로 삼는 반면 진화론에서는 그런 거 없이 뜬구름 잡는 얘기만 계속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볼까? 당시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인간의 발자국과 공룡의 발자국이 같이 찍힌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체적인 발견 시점과 장소와 함께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박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 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얘기라서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아마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꼬꼬마 중딩 입장에선 어떨까? 과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중딩이 구체적인 학설과 애매한 학설 중 선택해야 한다면? 이 책은 그 '구체적인' 측면에서 창조과학을 반박하여 중딩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방금 내가 예로 든 공룡/인간 발자국 화석도 반박당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이쪽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재미가 없는 책이다 -_-;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하나씩 가져와서 논파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창조과학에 발을 담갔었기 때문에 내가 읽은 주장들이 어떻게 논파당하는지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었지만 :)

책의 다른 부분은 별로 흠잡을 것이 없는데,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저자는 과학철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과학철학을 과하게 까대고 있다. 특히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데, 그저 순진한 과학자(? - 저자가 현직 과학자인지는 잘 모르겠다)의 시각으로 공격하는 거라 별 설득력이 없다. 창조과학자들이 자꾸 쿤 이론을 들고 오니까 그것부터 까자는 심산인 것 같은데, 글쎄... (비슷한 맥락에서, 저자가 파이어아벤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도 심각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접근은 과학철학 이론들을 제대로 이해한 후, 창조과학자들이 그걸 오용하고 있다는 걸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너무 작업이 복잡해지니까 차라리 그냥 안 건드리는 게 나았다고 생각한다.

아참. 책에서 계속 '하나님'과 '하느님'과 '신'을 섞어서 쓰는데 -_- 신의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헷갈려서 싫다.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는 한국 교회의 만년 떡밥이고, 굳이 무신론자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어를 골라 쓸 필요가 있을까? (설마 논란이 있으니까 '공평하게' 섞어 쓴 건가 -_-) 게다가, 비록 대부분의 창조과학자가 기독교 계열이지만, 창조과학자들 중에는 다른 종교 출신도 있으니 그냥 '신'이라고 쓰는 게 가장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저자는 무신론자니까 종교의 종류에는 무관하게 사이비과학을 떠드는 자들만 반대하면 되는 거 아닌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이 기독교를 까는 건 아니지 않은가?)

@ 성경적 창조론에 관한 내 신념은 이 글에 요약되어 있다. 옛날에 쓴 글이지만 생각은 그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소개한다.
by 로보스 | 2009/03/12 10:04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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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versilov at 2009/03/12 10:16
그러고 보면 생물학과 교수님들은 참 딜레마를 가지실 것 같은데, 학교가 미션스쿨이다 보니, 교수님도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 많으세요. (연구실 들어갈때 첫번째 질문이 학생의 종교는 무엇인가? 였...쿨럭) 한번은 저희 물리학과 교수님이 진화와 창조사이에서 어떻게 딜레마를 극복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창조는 내 신앙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이루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반면에 나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진실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의 속성의 일부분임을 안다. 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내 직업-학자로서 자연의 원리에 다가가는 것-과 내 신앙에 둘다 충실할거다. 고 대답하셨다는군요.

진화론은 어떤 면에서라도 종교를 공격하지 않는데 말이죠. 종교가 이전까지 과학을 자신을 증명하는 노예로 삼고 있었고 그 역할에 과학이 더이상 부응할 수 없게 되어서 종교측에서 화를 내는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기독교인입니다만 ^^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12 10:41
versilov님// 아, 정말 우문현답이로군요. :) 마지막 문단에 대해 약간 부연하자면, 저는 진화론은 성경을 공격하지 않고 성경은 진화론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가끔 성경을 공격하는 '과학자'와 진화론을 공격하는 '종교인'이 있다는데 있겠죠. 각자의 신념을 사실이라 믿고 싸우는 사람들이라, 말리기가 참 힘드네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9/03/12 17:45
잘 읽었습니다. :) 사실 전 과학철학과 관련한 부분에 무지한지라 상세히 보질 못했습니다. 말씀처럼 창조주의란 것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기에 일반인에 이해가 빠른 것이 사실인 듯합니다. 문제는 이런 자잘한 것들에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과학자들이 적은 것도 있고요.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역시 진화론이 결코 성경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냉담자이긴 하지만 저 역시 가톨린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창조주의 현주소는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굴드의 말처럼 종교와 과학은 서로 겹쳐지지 않는 영역에 있기에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Commented by _tmp at 2009/03/13 00:55
아세톤을 좀 먹었더니 -_-b
(전 어째 전자메이커 와서도 아세톤 먹고 삽니다;;;)

창조론은 자기네 지식으로 쓸만한 연대기 좀 짜오면 취급해 주도록 하죠.
(이와 관련해서는 지금도 유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전남대 출판부 간 '창조과학' 교과서를 참고하시길)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13 13:08
꼬깔님// 아 파워블로거께서 이 누추한 곳에... T_T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해주시고 가시네요 :)

_tmp 선배님// 앗, 그런 교과서가 있나요? @_@
Commented by _tmp at 2009/03/15 23:18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75981715&orderClick=LAG

그런데 품절이군요. 목차 보면 알겠지만 자기네 이야기는 사실상 전무합니다. 그 외에 비슷한 스타일의 서적이 여럿 있습니다만 물론 사서 볼 필요는... :)
Commented by AFHR at 2009/03/15 22:49
사실 자연과학'만' 공부하는 입장에서 과학철학 이론들이 골때린다는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얻은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한 자연과학도의 입장에서, 과학철학이니 뭐니 하면서 그런 방법론들을 하나씩 공격하는 게 과연 (논리성 여부를 떠나서) '실효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과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왜곡하거나 무분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근거만 제공할 뿐이니까요.

과학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굳이 그런 이론으로까지 만들어야 하는가...하는 생각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16 08:48
_tmp 선배님// 헉... 저거 참 물건이군요 =_=;;

AFHR님// 저도 자연과학'만' 공부할 생각입니다만? :) 과학철학이 과학자가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죠.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일 뿐. AFHR님이 과학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계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 학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과학자'들도 많다는 걸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과학철학이 과학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만, 마찬가지로 과학도 인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에게 근거를 제공해왔죠. (e.g.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어떤 학문이든 그걸 악용하고자 하면 끝도 없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at 2009/03/18 13:5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3/18 14:06
비밀글// 빙고 :)
Commented by yamury at 2009/04/06 22:18
읽다가 생각나서 몇자 적습니다. 강건일씨는 현직과학자는 아닌 듯 하나, 한국사회에서 칼세이건의 역할을 성심껏 하는 분입니다. '신과학은 없다'로 미신 속에 살면서도 미신을 믿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저를 포함)들을 개화!시켜줬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성을 쫓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처드 도킨스 역시 현직과학자는 아니죠.^^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07 09:00
yamury님//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 분이로군요.
Commented by 새벽안개 at 2009/06/13 12:46
리뷰 잘봤습니다.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6/15 10:43
새벽안개님//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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