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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키즈나님 블로그에서 서평을 보고 사게 된 책이다. 키즈나님이 "가볍게 집어들어 무겁게 내려놓았다."라고 하셨는데, 나 역시 그랬다. 이름을 들어본 책이고 지인(?!)이 추천한 책이니까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질렀는데, 읽다보니 그 까만 깊이에 압도되더라. 소설의 배경은 30년대 만주로, 민생단 사건을 그 제재로 삼고 있다. (이 사건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홍구 교수가 이 소설에 해제를 달았다.)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해 잘 몰랐던 나 같은 사람도 소설에는 쉬이 몰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연애소설인가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진행되던 소설이, 점점 그 박자를 빠르게 하여 급기야는 톡 치면 팍 끊어질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을 선보인다. 어느새 나는 30년대 만주에 있었다. 그는 누구인지, 그녀는 누구인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모든 것이 수상쩍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체만이 자신이 누군지 소리 내 떠들 권리를 지녔다. 시체가 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납득했으니. 유격구에서 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그 시체들은 저마다 이렇게 떠들었다. 나는 민생단으로서 동지들의 골수를 적에게 팔아먹었다. 나는 혁명을 보위하기 위해 내 살과 피를 팔아먹었다. 그 아우성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간도 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죽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경계에 서 있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민생단도 되고 혁명가도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항상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므로, 시시때때로 운명이 바뀐다는 뜻이므로. (248쪽)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표현이다. 30년대 만주에서 나의 정체성은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 누구에 따르면 공산당원이고, 누구에 따르면 민족주의자고, 누구에 따르면 일제의 주구고...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심지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불확실성을 깨고 나의 정체성을 '고정'시켜주는 사건이 있으니, 그건 바로 나의 '죽음'이다. (양자역학의 측정 개념이 떠오른다 우와앙!) 공산주의자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민생단이 되고, 일본 군대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혁명의 전사가 된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떠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태함수가 정체성 연산자의 고유함수로 붕괴했...)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면 세상은 참으로 우울하지 않겠는가. 나조차도 죽기 전까진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변하지 않는 정체성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나 보다. 책의 제일 마지막에는 한 편의 편지가 실려있다. 그 편지에서는 '사랑하는 자'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민족주의자, 저기서는 공산주의자, 거기서는 일제의 앞잡이일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항상 '사랑하는 자'이다! 라고 외치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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