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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권의 책([1][2])을 읽고 중세 철학에 관심이 생겨서 중세 철학 개론서를 찾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였다. 순수하게 '개론서'라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많은 배경지식을 요하는 책은 아닌지라 출퇴근 길에 설렁설렁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세 철학을 '대결' 구도로 풀어가고 있다. 목차를 한 번 볼까? 1. 동로마의 인용과 설정 - 카롤링거 왕조의 새 출발 2. 차별화 : 라틴 서유럽과 동로마의 대결 3. 예정인가, 자유인가 - 고트샬크와 에리우게나의 대결 4. 사물인가, 기호인가 - 베렌가리우스와 란프랑크의 대결 5. 어릿광대인가, 경험주의자인가 - 가우닐과 안셀무스의 대결 6. 정치와 문화를 위한 자유인가, 노예인가 7. 전통 학문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 전통주의자들 vs 아벨라르두스 8. 정직한 회의주의인가, 학문적 형이상학인가 9. 영혼은 개별적으로 불멸하는가, 세계 정신으로 되돌아가는가 10. 하느님의 나라인가, 지상의 평화인가 11. 조화인가, 비판인가 - 윌리엄 오컴에 대한 루테렐의 반론 12. 악마의 종자인가, 신의 아들의 철학인가 13. 지식인가, 무지의 지식인가 배경 설명인 1장은 빼고, 나머지 장들은 전부 '대결' 구도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런 '대결' 구도를 사용해 서로 상반된 철학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덕분에 이 책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철학자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그저 '대결'에 참여하는 한 선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내 오해도 사실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철학 이론들이 생각보다 다양하기 때문인지, 막상 서평을 쓰려고 키보드를 잡으니 기억나는 이론이 별로 없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강한 인상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는데, 중세 사람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벌인 수많은 논쟁들을 읽다보면, 이들 역시 이성을 극단까지 끌고 가서 고민했던 사람들임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안셀무스 논쟁이다. 일전에 고맙게도 노정태님께서 알려주셨듯이[3], 안셀무스는 신을 철저히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이다. 그의 증명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4]. 1)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2)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된다(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완전하지 않게 되므로 모순이다). 3)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현대적인 이성을 내려놓고 11세기의 이성을 장착해보자. 이 증명이 어떠한가?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 흥미로운 반박이 제기된다. 가우닐이라는 수도사가 이 증명이 잘못되었다며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반박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가우닐과 안셀무스는 한동안 토론을 펼치는데, 여기선 그 토론을 쫓아가기보다 이 토론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원한다. 우리는 흔히 중세가 '암흑 시대'였다고 생각하고, 철학이 신학의 시녀 역할에 불과했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이성이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가우닐은 수도사였고, 분명 유신론자였다. 하지만 그는 "신이 존재하는 건 존재하는 거지만, 이 증명으로 신의 존재성을 증명할 수는 없소! 증명 과정이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오!"라며 자신의 이성에 어긋나는 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우닐-안셀무스 토론 외에도 이 책에서는 이러한 예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과연 중세가 그렇게 한심한 시대였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중세 철학에 대한 갈증이 더해만 간다. 이번엔 무슨 책을 볼까나. <지성단일성>에 하도 데어서 -_- 원전보다는 잘 쓰인 개론서를 한 번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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