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S. 리그던, <수소로 읽는 현대 과학사>, 알마.

양자역학을 처음 배우던 꼬꼬마 시절, 수소 원자는 참 놀라운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보어 모형으로, 그리고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거기에 상대론적 보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인상적이라 살짝 정리해둔 적이 있는데, 그러곤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키누나가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남긴 것이 아닌가! 독후감을 읽으면서 다시 수소 원자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른 나는 당장 이 책을 주문했다. (물덕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책인 모양이던데 난 물리 오타쿠가 아니니까 ^ㅡ^)

이 책은 수소 원자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들을 시대순으로, 주제순으로 묶어서 설명하는 책이다. (엄밀히 시대순은 아니다. 뒷부분에 가면 비슷한 주제들을 묶어서 설명하다 보니 시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한다. QED 설명하면서 리드베리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한 예.) 저자의 필력도 대단하고, 번역도 훌륭해서 참 즐겁게 읽었다.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뛰어나지만, 여러가지 과학자들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현대물리학이나 양자역학 수업 시간에 배운 여러 과학자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이런 과목을 듣고 있는 학생이 읽는다면 참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교수님들 이 책 독후감 숙제로 내주세요 ㅋㅋ) 뭐 자세한 이야기들은 직접 책을 보시면 될 것인데, 이 책에 다루고 있는 주제가 상당히 포괄적이라는 점만 짚고 넘어가자. 초반에는 수소 원자를 기술하는 모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뒤로 가면 NMR이나 21 cm 방사선 등에 관한 주제들도 많이 나오거든.

참, 읽으면서 '이게 바로 과학자가 바라본 과학사를 기술하는 방법이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역사학자가 바라본 과학사와 과학자가 바라본 과학사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 책은 과학자가 바라본 과학사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사건들을 기술하는 순서에서 역사적 순서를 엄밀하게 따르기보다는 과학적 개념을 이해하기 쉬운 순서로 나열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현상인데, 일례를 들자면 레일리-진스 공식과 플랑크 공식을 들 수 있겠다. 내가 알기로 둘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발표되었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레일리-진스 공식은 1900년과 1905년[1], 플랑크 공식은 1901년[2]에 발표되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 한동안 갑론을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전 양자론을 설명할 때는 레일리-진스가 먼저 발표되었고 플랑크가 그걸 '반박'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래야 개념 잡기가 쉬우니까. ([2]의 History 참조.) 비록 이 책에는 흑체복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이 책에서도 정확한 역사적 흐름보다 개념의 흐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과학자가 바라본 과학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좀 딴소리지만, 토마스 쿤이 지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쿤은 과학사학이 하나의 역사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과학자가 바라본 과학사'를 포기하고 '역사학자가 바라본 과학사'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사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이렇게 연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랜만에 '부담 없는' 과학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이게 나한테 '부담 없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안에 있는 과학적 이론들을 한 번씩은 수업 시간에 들어봤기 때문이겠지만 -_-; (Lamb shift 이런 걸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양자 2 시간에 주워들은 적은 있다 ㅋ) 끈 이론이나 우주론에 대한 심도 있는 책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그리 어렵지 않은 주제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
by 로보스 | 2009/03/02 15:57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lovos.egloos.com/tb/224988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독서 리스트. at 2009/03/02 15:58

... 13-1/14) [감상문] 스티븐 제이 굴드,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 세종서적. (1/22-1/30) 존 S. 리그던, 수소로 읽는 현대 과학사, 알마. (2/2-2/3) [감상문] 강건일, 진화론 창조론 산책, 참과학. (2/17-2/20) 한스 페터 베크 보른홀트 외, 알을 낳는 개, 인디북. 찰스 윈, 아서 위긴스, 사이비 사이언스, 이제이북스. 데 ... more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즐겁게 살아야죠. :)
by 로보스
Calendar
메모장
카테고리
|소개|
|일기|
|감상|
|과학|
|잡념|
* 홈페이지 ('02-'03)
* 네이버 블로그 ('05-'06)
최근 등록된 덧글
낙동강 방어선 결사항전..
by _tmp at 00:31
안녕하세요 요즘 한가해..
by 김은수 at 00:22
난 이런 것만 보면 전국 ..
by 긁적 at 01/06
허허허허허허허.
by 긁적 at 01/06
부산의_위엄.jpg
by 소시민 at 01/06
허허허 좋군? ㅋㅋㅋ
by Yuki37 at 01/06
허허허... 완전히 눈밭..
by 매치어 at 01/06
barb님// 메일로 보내드..
by 로보스 at 01/06
앗 정말 감사합니다 이글..
by barb at 01/05
비밀글님// 아 도와드리고..
by 로보스 at 01/05
wolga님// 감사드립니다..
by 로보스 at 01/05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쓰시..
by wolga at 01/04
귀염둥이님// 걱정해주시..
by 로보스 at 12/30
끝나지않은2000년의 전쟁-..
by 귀염둥이 at 12/29
moomo님// 안녕하세요..
by 로보스 at 12/28
독서리스트 책들은 어떻..
by moomo at 12/28
비밀글님// 네, 저도 번..
by 로보스 at 12/25
귀염둥이님// 말씀은 감..
by 로보스 at 12/25
이책은 이슬람과 유대인..
by 귀염둥이 at 12/25
ExtraD님// 어이구 Extr..
by 로보스 at 12/22
최근 등록된 트랙백
네이트온 사칭 - 메신저..
by ★ Stella et Fossilis
2007 - Gerhard Ertl
by 한글
Scheme으로 루저 인증..
by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루져 테스트 [asp.net]
by 緣
루저코드 - 파스칼 버전
by Divine Power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