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후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뭐 그래봤자 내가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읽는 건 아니고, 그저 누가 추천해주면 쟁여놨다가 읽어놓는 정도지만. 이 책도 여성주의를 제법 공부한 친구가 권해준 책인데, <새 여성학 강의>보다 좀 더 개방적인 시각이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도 기본적으로 여러 필자가 참여해 각자의 글을 풀어놓는 스타일인데, 전반적인 통일성이 제법 유지되는 듯 했다. 훌륭훌륭.

여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인 섹슈얼리티(sexuality)도 유의해서 사용해야 하는 단어이다. 나도 막상 말하려니까 자신이 없는데, 흠 일단 용어 정리 좀 해봐야겠다. 우선 성(性)을 묘사하는 단어로 섹스(sex)와 젠더(gender)가 있는데, 이들은 잘 알려진대로 각각 물리적으로 주어진 성과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성은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섹스에 관한 명제지만 "여성은 얌전하고 조신하다."는 젠더에 관한 것. 사실 이걸 구분하는 건 꽤 어려운 작업인데, 예컨대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라는 문장이 섹스에 대한 것인지 젠더에 대한 것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섹슈얼리티는 '성적 자아'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개인이 성적으로 느끼고 욕구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총칭한다. 예를 들면 "나는 포르노를 보고 싶다." 같은? 이런 예문만 봐도 느낄 수 있지만 섹스/젠더와는 다르게 다뤄야 할 것 같다. 우선 섹스/젠더는 특정 성별 집단에 대해 규정되는 것이지만 섹슈얼리티는 개인적이다. 섹스/젠더는 '특성'을 나타내지만 섹슈얼리티는 그보단 '욕구'에 가깝다. 뭐 대충 나의 이해는 이런데, 내 이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독자분은 언제든 과감하게 답글을 달아주시길 :)

지금까지 내가 접한 여성주의 주장들은 주로 섹스-젠더의 도식을 이용하는 쪽이었다. 예를 들면 "XX는 섹스가 아니라 젠더다. 굴레를 벗어 던지자!"와 같은 주장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췄기에 (내 입장에선) 상당히 참신했다. 개인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 욕구는 어디에서 오는가? 책에 나오는, 개인의 성적 욕구를 조사한 사례들은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분명히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임에도 그걸 드러내서 말하는 건 무언가 쪽팔리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 사회에서, 이렇게 활자화된 욕구를 만나게 되다니. (이 발언은 사실 내가 이쪽으로 전혀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발언이기도 할 것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섹슈얼리티를 만드는 주체'를 계속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A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자. '나는 포르노를 보고 싶어. 하지만 보는 건 나쁜 짓이지. 보지 말아야겠다.' 자, 여기서 A의 섹슈얼리티를 결정한 것은 누구인가? '보는 것은 나쁜 짓이다'라는 가치관을 만든 자이다. 그 가치관은 사회에 의해 주입된 것이고, 이는 참된 섹슈얼리티가 아니다. '나는 포르노를 보고 싶어.'가 참된 섹슈얼리티이다. 뭐 대충 이런 진행인데, 보면서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의 구조가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규정한다. 하지만 구조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거부하자!" 푸코도 많이 인용되고.

그럴싸한 생각 아닌가. 헌데 이 생각에도 맹점이 있다. "그럼 참된 섹슈얼리티는 뭔데?"라는 말에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포르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순수하게 나로부터 흘러나온 생각인가? 그것 역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포르노'가 점하고 있는 위치에 따르는 생각 아닌가? 내가 포르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포르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렇다면 '포르노를 보고 싶다' 역시 (다른 종류의) 사회에 의해 만들어져 주입된 생각 아닐까? 이 책을 권해준 친구한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그런 비판을 받는다고 한다. 좀 오래된 이론이라나 ㅋㅋㅋ

책에서 정말 인상적으로 읽은 주장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성폭행'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거부하는 여성에게 강제로 삽입 성교를 실행하는 것? 그렇다면 삽입 성교는 안 했지만 여성의 질에 강제로 이물을 삽입했다면 성폭행이 아닌가? 아, 아님 여성의 질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다른 신체 부위를 이용해 더한 수치심을 주었다면? 피해자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면? 성폭행이라는 말이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필자는 그래서 '성폭행'이라는 말을 따로 정의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대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개념을 도입해 아무도 명시적으로 정의할 순 없어도 무엇인지는 다들 알고 있는 개념으로 만들자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에서 '게임'이 벌어져야 한다. 성폭행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자유롭게 이야기하자.('가족 유사성'의 개념으로 성폭행을 정의하자는 건데, 이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인용하는 것이 옳은 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법적으로 성폭행을 정의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 주장에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참신한 주장이라고 생각해서 소개한다 :)
by 로보스 | 2009/02/13 12:03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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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미술사, 예경. (11/29-)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길. 사회 한국성폭력상담소,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1/15-1/21) [감상문] 한스 피터 마르틴 외,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정남구, 통계가 전하는 거짓말, 시대의창. 전국사회교사모임 대안사회분과, 우리 사회를 움직인 판결, 휴머니스트. 김욱, 교양 ... more

Commented by AFHR at 2009/02/15 01:06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입장에서, 상당히 깔끔한 글 감사드립니다 :D

본성-양육 논쟁이 저런 분야에서까지 불거지네요. 개인적으로는 본성이냐 사회적 합의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난감한 기분이 들더군요. 인간의 사회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양육'에 의해서만 형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정도의 생각이겠죠. 물론 이런 부분까지 들어가기 시작한다면 논점이 지나치게 흐려지겠지만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2/16 08:39
AFHR님// 이런 책에서 그런 걸 읽어내시다니, 역시 천상 생물학도시군요 :) 왠지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 떠오르는 생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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