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석, <과학의 지형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오랜만에 독후감 포스팅을 해본다. 사실 그 동안 책을 안 읽었던 것은 아닌데, 모종의 이유(?)로 독후감을 못 적고 있었다. 슬슬 밀린 독후감을 정리해보련다.

이 책 <과학의 지형도>는 이대에 개설된 동명의 수업[1] 강의자료를 가지고 쓴 책이다. 아무래도 교양 수업이다보니 그리 깊게 들어가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 때문인지 이쪽에 관심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고 차라리 다른 책을 보라는 (^^) 저자의 친절한 말이 있었지만, 나야 뭐 관심만 있지 아는 게 없으니 읽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에 덥석.

제목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의 각 분야 학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개념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물론 자신의 시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딸려 있다.) 이를 위해 이 책은 기본적으로 '과학사'를 그 틀로 삼는다. 현대과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라 불릴만한 아이들을 역사적 순서대로 이것저것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야기도 상당히 평이하게 쓰여 있어서, 이런 쪽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를 (조금 까칠하게) 정리해둔다. 우선 저자의 전공은 '과학사'가 아니라 '과학철학'이다. 그러다보니 과학사학자들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과학사학자들은 "과학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은 어떤 모양인가/어떤 모양이어야 하는가"를 중요하게 보는데, 이 책에도 어느 정도 과학철학자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느꼈다. (제목에서부터 '과학이 어떤 모양인가'를 이야기한다는 느낌이 팍팍 들지 않는가 ^^) 구체적인 예로 갈릴레오를 생각해보자. 이 책은 갈릴레오의 성공과 그의 '과학적 신념'을 엮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일전에 배운 과학사에서는 그의 '정치성'을 상당히 크게 생각하고 있었다. 두 관점이 서로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이다.

이건 조금 아쉬운 부분인데, 책을 읽어나가면서 어떤 주제는 굉장히 깊게 다루고 어떤 주제는 그냥 훑고 지나가는 현상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이 책의 목차만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1장에서 3장에서는 그리스 자연철학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4장부터는 갑자기 2000년을 뛰어넘어 과학혁명을 다룬다. 8장까지 대충 과학혁명과 그에 딸린 화학혁명을 다루고, 또 갑자기 20세기로 점프하여 양자역학을 이야기한다. 이것 역시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차이라고 생각되는데, 과학사학자라면 이런 개론서에서 각 시대를 고루 다루는 것을 목표로 했을테고, 중세 과학이나 19세기 과학도 빠짐없이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발칙한 상상이지만, 책에 나온 저자 소개를 보면서 저자가 자신이 '익숙한' 주제를 의도적으로 깊이 다룬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저자는 물리학 학사, 철학 석사를 거쳐 과학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1장에서 3장은 철학도라면 누구나 공부하는 서양철학사의 첫부분이고, 4장에서 8장은 물리학에서도 꽤나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이다. 9장에서 다루는 양자역학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 『대응과 상보성(Korrespondenz und Komplementaritat)』이라는 양자역학 관련 논문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고, 10장의 물리학-화학의 상관관계는 연구 논문 「화학은 물리학으로 환원되는가」의 내용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11장부터 시작되는 생물학 이야기는 그가 공역한 『이것이 생물학이다』에 빚지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까칠한 생각만 하면서 책을 읽은 건 아니다. 책에 있는 여러 지식들이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열심히 고민해보기도 했고, 저자가 제시하는 참신한 시각들을 보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살짝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분명 저자는 여러 과학들을 연결하는 '지형도'를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훌륭한 지형도고, 이런 쪽을 평소에 생각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 건방진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 내 성에는 그리 차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과학을 전부 꿰뚫는 '지형도', 나라면 어떻게 그릴지 고민해봐야겠다.

@ 키오쿠님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남기신 바 있다.
by 로보스 | 2009/01/30 18:33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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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iininglis at 2009/02/06 18:37
고인석 선생님 나 1학년 때 과학철학강의 해주셨던 분.. 스마일이 좋았던 ;)
@ me.. 영재센터조교 KTG...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2/06 18:57
miininglis 형// 와 오랜만이에요 ^^ 잘 지내시나요? 이글루스로 옮기신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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