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외, <현대 철학의 흐름>, 동녘.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과기역 수업을 들을 때부터였다. 그 수업에선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역사'를 훑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과학이란 결국 자연철학이었기 때문에 철학을 어느 정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즈음 때마침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만났고, 이렇게 고대 철학과 근대 철학을 맛보면서 철학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에는 도무지 재미를 붙일 수 없었다. 끙끙거리며 겨우겨우 읽어낸 <시뮬라시옹>도, 읽다가 집어던진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현대 철학은 나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남게 되었다. 뭔가 얻어낼 수 있을까 해서 담 너머에서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막상 얼굴을 맞닥뜨리면 눈을 깔고 도망쳐버리는 소심한 짓을 반복하며 말이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후배가 자기네 교양 철학 수업 교과서라고 소개해 준 책이다. (이거 무슨 간증문 같다 -_-;;)

이 책에서는 현대 철학의 주요 사조를 굵직굵직하게 네 개로 분류해서 소개하고 있다. 현상학과 실존주의, 비판 이론,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분석 철학이 그들이다. 뒤의 두 아이는 그나마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관심 덕분에 어느 정도 친숙했지만, 앞의 두 아이는 전혀 생소한 아이들이었다. 그냥 그런 애들이 있다는 정도만 아는 수준? 이 책을 통해 이 아이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특히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현상학은 무슨 '현상'을 보는 건지, 실존주의는 왜 '실존'주의인지, 비판 이론은 뭘 '비판'하는 건지- 이 정도만 해도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구성은 이렇다. 각 사조는 다시 그 사조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한 명씩 다루는 여러 개의 글꼭지로 나뉜다. 독특한 점은, 각 글꼭지의 필자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해당 철학자를 '전공'한 사람에게 필자를 맡겼기 때문이다. 이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전공자다보니 각 철학자에 대해 정확한(가장 보편적인) 시각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글마다 문체나 철학관 등이 들쭉날쭉 오간다는 단점도 있다. 실제로 어떤 글은 상당히 어렵고, 어떤 글은 말 그대로 '소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어떤 글은 쉽고 친절하다.

이렇게 각 글의 느낌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 책을 뭉뚱그려서 평가하기는 조금 힘들다. 확실한 건, 필자들이 '초보자'를 상대로 '소개글'을 쓴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설명 방식은 제각기 다르더라도 많은 배경지식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각 글에서 묻어난다는 것이다. 이게 참 좋았다. 또한 각 사조를 시작할 때 사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제시해서 헤매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것도 좋은 포인트! 각 글꼭지 말미에서 '더 읽어볼 책'을 소개해주는 것도 좋고. 이런 걸 보면 초보자를 위해 무지 노력했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아쉬운 점을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면 우선 '해석학'에 대해 설명이 별로 없었다는 점. 보니까 현대 철학이랑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학 사조(?) 같은데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소쉬르 언어학이나 칸트 철학은 설명이 꽤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아쉬웠다. (특히 데리다 읽을 때 혼란이 @_@) 이 책에서 사르트르와 보드리야르를 안 다룬 건 조금 의외였다. 나는 얘들이 진짜 킹왕짱 중요한 애들이라고 생각했거든. (음. 그러고보니 에코는 철학자가 아닌가? -_-a)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이제 대충 안면은 텄으니 부족하다고 생각한 부분들은 내가 스스로 찾아서 공부해나가면 될테니까. 읽는데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즐거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깝지 않다 :)
by 로보스 | 2009/01/08 16:31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lovos.egloos.com/tb/219688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독서 리스트. at 2009/01/08 16:34

... 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K. 플라시, 중세 철학 이야기, 서광사. 조나단 웨스트팔, 철학적 명제들, 서광사. 박정호 외, 현대 철학의 흐름, 동녘. (12/29-1/7) [감상문] 과학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사이언스북스. 김영식,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 생각의나무. 고인석, 과학의 지형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스티븐 제이 굴드, 레오나르도가 ... more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즐겁게 살아야죠. :)
by 로보스
Calendar
메모장
카테고리
|소개|
|일기|
|감상|
|과학|
|잡념|
* 홈페이지 ('02-'03)
* 네이버 블로그 ('05-'06)
최근 등록된 덧글
낙동강 방어선 결사항전..
by _tmp at 00:31
안녕하세요 요즘 한가해..
by 김은수 at 00:22
난 이런 것만 보면 전국 ..
by 긁적 at 01/06
허허허허허허허.
by 긁적 at 01/06
부산의_위엄.jpg
by 소시민 at 01/06
허허허 좋군? ㅋㅋㅋ
by Yuki37 at 01/06
허허허... 완전히 눈밭..
by 매치어 at 01/06
barb님// 메일로 보내드..
by 로보스 at 01/06
앗 정말 감사합니다 이글..
by barb at 01/05
비밀글님// 아 도와드리고..
by 로보스 at 01/05
wolga님// 감사드립니다..
by 로보스 at 01/05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쓰시..
by wolga at 01/04
귀염둥이님// 걱정해주시..
by 로보스 at 12/30
끝나지않은2000년의 전쟁-..
by 귀염둥이 at 12/29
moomo님// 안녕하세요..
by 로보스 at 12/28
독서리스트 책들은 어떻..
by moomo at 12/28
비밀글님// 네, 저도 번..
by 로보스 at 12/25
귀염둥이님// 말씀은 감..
by 로보스 at 12/25
이책은 이슬람과 유대인..
by 귀염둥이 at 12/25
ExtraD님// 어이구 Extr..
by 로보스 at 12/22
최근 등록된 트랙백
네이트온 사칭 - 메신저..
by ★ Stella et Fossilis
2007 - Gerhard Ertl
by 한글
Scheme으로 루저 인증..
by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루져 테스트 [asp.net]
by 緣
루저코드 - 파스칼 버전
by Divine Power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