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깨끗한 상자'인가?
과학은 '썩은 상자'인가? (아이추판다님)

어제 올린 독후감에 관하여 아이추판다님께서 트랙백을 보내오셨기에 이에 답한다. 아이추판다님의 글은 내가 놓치고 있는 점을 잘 짚어주셨다. 분명 과학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여타 학문들과 다르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단순히 사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 대한 '실험'에 근거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100% '깨끗한 상자'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독후감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바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이추판다님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말 중에 "현실은 시궁창"처럼 훌륭한 표현도 없다. 과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과학판도 인간의 욕망과 미숙함이 소용돌이치는 바닥인 이상 진리를 향한 합리적 과정만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현시창'이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말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나타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궁창은 증류수도 아니지만 순도 100%의 오염물질도 아니다. 현실은 부패해있더라도 균일하지 않다. 현실의 복잡 다단한 양상은 한 두 마디의 말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추판다님 글에서)

결국 나와 아이추판다님은 과학이 100% '썩은 상자'도, 100% '깨끗한 상자'도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는 셈이다. 물론 내 독후감에서 "100% 썩은 상자는 아니다"라는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내가 과학을 100% 썩은 상자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100% 깨끗한 상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과학을 100% 썩은 상자라고 보는 사람보다 100% 깨끗한 상자라고 보는 사람의 수가 더 많고 이들이 일으키는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이쪽을 공격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변명을 한 마디 더 붙이자면, 아이추판다님께서 글을 쓰게 된 원인으로 보이는 다음 문장은 사실 그렇게 과격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사과 박스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아니, 사실 그렇게 거창한 얘기도 아니다. 그냥 과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고, 과학자 사회도 다른 사회와 똑같다는 얘기다. (내 독후감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회'는 다른 학자들-다른 학자 사회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과학은 다른 학문과 똑같고, 과학자 사회도 여느 학자 사회와 똑같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과학자가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윤리적인 면에서 더 낫다고 할 수 없으며, 과학자 사회가 일반적인 인간 사회에 비해 민주적인 면에서 더 낫다고 할 수 없다"라는 의미로 쓴 문장이다. 독후감 속에서 줄곧 강조하지만, 과학자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돈과 명예를 추구하며, 과학자 사회도 여느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권위와 명성이 지배하고 있다. 결론부에서 이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쓴 것이 위의 문장이며,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내 글쓰기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도 부족했다 -_- 퇴근 시각이 닥쳐오고 있어서 마무리를 허겁지겁 지었다능...)

내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아이추판다님과 나의 과학관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과학이 100% 깨끗하지도 100% 썩어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학문과 차별화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이추판다님은 과학을 다른 학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낫다는 결론을 내리셨고, 나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과학이 (100% 깨끗한 것이 아니니까) '썩어있다'고 말한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글을 맺기 전에 아이추판다님의 글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한 마디 남긴다. 아이추판다님은 '재현을 통한 반박'을 상당히 신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재현을 통한 반박'이 과학의 통상적인 발전 기제라는 것에 의구심을 품는다. 내 독후감 속에서는 이걸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기에 (이 글의 목적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이 글에서 좀 더 설명을 해볼까 한다. 우선 독후감에 쓴 표현을 옮겨온다.

이 우상이 부서지고 나면 '재현을 통한 반박'의 우상을 부술 차례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들이 다른 과학자의 실험을 '재현'하여 그 신뢰도를 검증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이 '재현'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 남이 한 거 재현해봤자 밥도 떡도 생기지 않으니까. 첫번째 우상을 부쉈으면 당연히 딸려오는 귀결이다. 다른 과학자의 실험을 재현해보는 경우는 보통 그 실험을 응용해서 다른 일을 해보려고 할 때인데, 그렇다면 하나도 안 중요한 실험에 대해선 '재현을 통한 반박'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 책은 '하나도 안 중요한' 연구 주제에 대해 가라 데이터로 수많은 논문을 출판한 사기꾼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 주제는 다른 과학자들의 흥미를 끌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 실험'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 사기꾼은 이를 이용해 수많은 논문을 CV에 넣을 수 있었다. 이래도 '재현을 통한 반박'이 과학계의 자체정화 시스템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내 독후감 중에서)

역시 급하게 쓴 독후감이라 논지가 마구 흩어져있다. 아니, 다시 읽어보니 내용을 완전히 잘못 쓴 것 같다. 실제로는 이 '재현'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는데, 뒤에 붙인 근거는 그러기엔 너무 약한 근거네. 다시 정신줄 잡고 정리해보겠다.

우리는 흔히 '실험의 재현'을 통해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환상(특히 포퍼주의)을 품고 있는데, 실제 과학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는다. 이건 '어두운 그늘 아래서 사기치는' 과학자들 뿐 아니라 대명천지에 사기 치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은 다른 과학자가 출판한 논문을 보고 '일단 그 결과를 믿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듣보잡이 엄청난 결과를 냈다면 의심을 해보겠지만, 권위 있는 연구자가 낸 논문이라면 일단 신뢰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실험을 해본다. 자, 여기서 실험 결과가 예상대로 안 나왔다면 연구를 의심해봐야 하는가?

불행히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논문 속에 상세한 실험 과정을 기술하곤 하지만, 모든 과정을 기술하지는 않는다. 유기 합성을 해보면 동일한 레시피(recipe; 합성 프로시저를 일컫는 말)를 가지고 합성을 해도 어떤 사람은 높은 수율을, 어떤 사람은 낮은 수율을 얻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잘하는 사람은 계속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서 "손을 탄다"고 부르는데, 레시피에 명시되지 않은 여러가지 개인적인 버릇이라든지 관찰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험실에서 훈련받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요소들을 조절하는 법인데, 이런 요소들은 발행되는 논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험 결과가 예상대로 안 나왔다고 해서 그 논문이 뻥을 치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논문 속에서 기술하지 않은 '어떤 요소'가 있어서 실험 결과가 예상대로 안 나온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예들을 읽어보면, 많은 경우 과학자들이 사기 논문을 처음 접하고 그 결과를 재현해보려 할 때 예상 결과가 안 나오면 논문을 의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실력을 의심하곤 한다. 그래서 논문을 제출한 연구실에 연락을 취해서 대신 실험을 해달라고 하거나 전문가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재현을 통한 반박'이 가능할까?

그 뿐만이 아니다. 돈이나 노력이 많이 들어 한 번 연구가 이뤄지면 재현하기가 어려운 분야도 있다.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사기 논문이 발표되어도 그 진위를 입증하기가 어렵다. 책에 실린 예 중에 굉장히 인상적인 예가 하나 있어 소개한다. 60년 넘도록 심리학계를 속인 사기꾼이 있었다. 이 사람은 아무런 실험도 조사도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논문을 만들어냈는데, 특히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어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의 지능을 연구한 논문을 만들어서 큰 명성을 얻었다. 어떻게 그럴수가? 이 사람은 통계학에 매우 능숙했고, 자신의 통계학 지식을 이용해 '적절한' 데이터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별 의심을 받지 않은 것이다. 이 논문이 재현을 통해 반박되었을까? 아니다! 사람들은 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실험 데이터를 믿었고 이 논문은 한동안 심리학 교과서에 인용될 정도로 신뢰받았다. 이 사람이 죽고 난 후에서야 이 논문이 반박되었는데, 그 반박 과정 또한 재현을 통해 이뤄지지 않았다. 이 논문을 검토하던 어떤 심리학자가 그 통계적 수치(서로 다른 쌍둥이 쌍에 대해 상관계수가 전부 동일한 값이었다고 한다.)에 의구심을 품었고, 그 의구심을 바탕으로 연구 노트나 그 밖의 자료들을 조사하여 사기임을 밝혀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과학에서 반박이 일어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과학에서 반박이 일어날 때 '재현'만을 통해 반박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보통 그 논문 자체의 합리성과 정합성(consistency), 저자의 신뢰성 등을 반박의 근거로 삼지, 그 논문에서 제시하는 실험을 직접 해봤는데 결과가 안 나왔다는 것만으로 반박의 근거를 삼지는 않는다. 어떤 이론이 반박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재현만으로 반박한다고 하면 윤리적으로 더 큰 문제를 낳을 수가 있는데, 실험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결과를 보고했다면 그 논문은 아무런 문제 없이 과학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 써놓고 보니 이것도 아이추판다님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내용인 것 같다 -_-;;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졌는데, 이쯤에서 정리한다. 나는 과학이 100% 깨끗한 상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해 독후감을 썼다. 이 이데올로기 안에는 과학자는 윤리적이고 정직하다는 생각과, 과학 연구는 '재현'을 통해 반박될 수 있기에 충분히 자정작용이 가능하다는 생각, 과학자 사회는 민주적이고 평등하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고, 이들은 전술한 책 안에서 실례를 바탕으로 반박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100% 썩은 상자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과학이 100% 깨끗한 상자라는 이데올로기가 100% 썩은 상자라는 이데올로기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학주의에 반대하며, 설사 과학주의가 반과학주의보다 실재에 가깝다고 해도 그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by 로보스 | 2008/12/30 10:18 | |잡념|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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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미리내 at 2008/12/30 20:19
무엇을 보더라도 항상 어떤 현상을 단언한다는 것이 제일 무섭습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일뿐더러,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비교적 과학에 좀 더 친화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더라도, 과학이 100% 깨끗한 상자라는 것에는 저도 물론 반대합니다.

하 지만 과학주의가 반과학주의보다 위험성이 크다는 것에는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학을 빙자한 사기가 더욱 무서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과학 전반에 적용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매일 일어나는 자동차 사고와, 한 번 터지면 크게 나는 비행기 사고 같달까요. 비행기 사고가 더 크게 난다고 해서 자동차보다 덜 안전한 것은 아닌 만큼, 과학을 빙자한 사기가 더 위험성이 큰 것은 맞지만 그 위험성을 과학 혹은 과학주의 전반으로 몰고 가는 것은 조금 납득이 되질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Commented at 2008/12/30 20:2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31 23:57
미리내님// 관심 고맙습니다 ^^ 미리내님께서 세번째 문단에서 제기하신 질문은, 제가 보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의 상대적 위험성을 평가한 부분에 대한 질문과 과학을 빙자한 사기의 위험성 때문에 과학 전체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 타당하느냐는 질문으로 말입니다.

우선 두번째 질문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저는 과학 전체를 범죄자 취급하지 않습니다 ^^;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과학의 작동 메커니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더라"인 거고, 그걸 밝혀내기 위해 사기꾼 과학자들의 사례를 참조한 것 뿐이죠. ('과학을 빙자한 사기'라는 말은 결국 '과학'은 죄가 없고 그 시스템을 이용한 놈들이 사기꾼이라는 의미가 되는데요, 두 편의 글에서 썼다시피 저는 그런 개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반면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는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 제가 이 글에서 사용한 '과학주의'는 과학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며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이고요, 반대로 '반과학주의'는 과학을 여느 학문과 같게 취급하고, 심지어 단순한 미신과도 동등한 존재로 보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어느 쪽이나 '실재'를 보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저는 과학주의가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지나치게 신뢰했다가 뒤통수를 맞는 손해가 과학을 불신해서 얻는 손해보다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용어를 명확하게 쓰지 않아서 드린 혼란 같네요. 죄송합니다 (_ _)

비밀글님// 기회가 닿으시면 꼭 한 번 읽어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
Commented by 준식이 at 2009/01/15 18:52
킁.. 일란성 쌍둥이 이야기.. 환경이 지능에 중요하다 이런 내용의 연구였나요? 여태까지 그렇다고 믿고 있었던 거라-ㅅ-;;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1/19 08:38
준식이님// 네. 이 책에 등장한 연구자의 경우는 그런 의도로 논문을 썼죠. 문제는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론이 완전 부정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연구결과에 의해 옹호될 수도 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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