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봉, <우리말의 탄생>, 책과함께.

초록불님 블로그에서 소개글을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른 책. 저 글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최초의 우리말 사전 <조선말 큰 사전>의 발간 과정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역사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책인지라 내용을 상술하는 대신 감상 위주로 정리한다.

일단 이 책의 특징은 '풍부한 인용'에 있다 할 것이다. 책 곳곳에서 당시 실제로 발표되었던 글을 인용한 부분이 눈에 띈다. 특히, 그 내용에 가감을 가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를 실었기 때문에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현실감이 느껴진다. 어려운 한자어 표현과 이두식 표현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_-; 지나치게 어렵다 싶은 글에 대해서는 현대어 해석을 달아주었지만, 대부분의 글에는 현대어 해석이 없어서 이해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책의 주제가 '사전 편찬의 역사'에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줄창 사전 얘기만 읊는 것은 아니다. 사전 편찬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의 개인적인 일대기도 많이 등장하고, 시대적 배경이나 정치 상황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당시 분위기를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해놓았다. 특히 내가 눈여겨 본 부분은 당시 우리말을 주제로 벌어진 여러가지 토론이었는데, 예를 들어 일전에 <우리말의 수수께끼>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모아쓰기-풀어쓰기 논쟁이 흥미진진하게 서술되고 있다. 나는 일제 시대라고 하면 아무래도 학문 등이 덜 다듬어진 형태였을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 등장하는 국어학자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들은 국어의 문법적 구조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언어학/음성학적 지식이 풍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피튀기는 논쟁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절로 신이 나지 않겠는가!

이 책에 흥미를 느낀 또 하나의 요인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분들을 알지만 그분들은 나를 모르겠지;) 주시경 선생은 물론이고, 최현배 선생, 이희승 선생 등 해방 이후 국어학계에서 '한 가닥' 한 사람들은 다 등장한다. 내가 잘 모르는 월북 인사들까지 합치면 이 얼마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일지 ㄷㄷㄷ 재미있었던 것은, 최현배 선생은 해방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일했고 이희승 선생은 서울대학교에서 일했다는 점인데, 최현배 선생은 약간 민족주의적인 방향에서 우리말을 연구했고 이희승 선생은 좀 더 서양 언어학의 관점에서 우리말에 접근했기 때문에 이런 성향이 이후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학풍에 고대로 묻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기 때문에 부정확할지도a)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책이 연대기순으로 주제를 나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 같이 당시 인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약간의 혼란이 온다는 점인데, 이건 뭐 저자의 의도였을지도 모르니 굳이 비난하지 않겠다. 일단은 재미있게 읽었으니까. 우리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고, 이런 쪽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by 로보스 | 2008/12/22 20:27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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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ulia at 2008/12/22 20:39
헐퀴 로보스님 이 책은 저희 국어'학'사(국어사가 아니라...) 시간에 선생님께서 잠시 언급하셨던 사전의 역사가 나와 있는 그 책 아닌가요 덜덜덜.... 최현배 선생님은 그렇다 치고 이희승 선생님마저 알고 계시는 로보스님이 전 두려울 따름이고 그렇구 ㅠㅠㅠㅠ
히히 맞아요. 그래서 연대 쪽 선생님들은 대체로 문법 어휘를 순우리말로 사용하시고 서울대쪽 선생님들은 한자어로 사용하시는 경향이 있죠. 순음=입술소리 이런 형식이라고 해야 하나.
재미있는 책 읽으셨네요! 저도 나중에 시간 나면 천천히 함 읽어보아야겠어요^///^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8/12/22 20:44
우왕. 진짜 일제시대 분들이 생각만큼 학문적 깊이가 얕았던 것은 아니라는 걸 이런저런 책 읽다 보면 느껴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22 22:20
줄리아님// 아 이 책이 그런 책이었군요 ㄷㄷㄷㄷㄷㄷㄷ 저는 그냥 초록불님이 추천하시길래 생각없이 봤을 뿐이고 ㅠ_ㅠ 이희승 선생님은 잘 모르면서 그냥 국어사전에서 본 이름이라 아는 척 했을 뿐이고 ㅠ_ㅠ 줄리아님 이 책 읽으시고 리뷰 쓰시면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ㅁ+

위자드킹// 어 그렇더라 orz 우리가 너무 오만한 것 같아 ;;;
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12/22 23:04
우리말의 다듬어짐 및 사전에 관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이런 게 있었군요! <교수와 광인>이라는 책에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잘 설명하고 있지요. 얼마 전 생각의 나무 問 라이브러리에 한국어에 대한 고찰책이 나와서 기분좋기도 했답니다. (사정상 지르지는 못하지만ㅠ)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_^ 로보스님 책 소개 볼 때마다 제 가슴이 뛰어요 :$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23 09:33
키오쿠님// 이 책의 자매품(?)으로 <영어의 탄생>이라는 책이 있더군요. 그 책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던데, 두 책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 책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조소영 at 2009/04/28 08:55
도입 부분에 가슴이 뭉클거리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분들께 감사드리며, 내가 글을 앎에 감사드리며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28 10:13
조소영님// 저 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국어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요...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내신 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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