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Z 반응.
오랜만에 화학글 하나 날립니다. 한동안 임시저장 리스트에 품고 있던 녀석인데, 이제 놓아줄 때도 된 것 같아서요. 오늘 이야기할 반응은 화학 동역학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흥미로운 반응입니다. 아마 아시는 분도 많이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자, 일단 비디오 한 편 감상하시고 시작해볼까요?

비디오 보기

이건 뭥미? 라는 생각이 드시죠? -_-;; 이 비디오는 벨루소프-자보틴스키 반응(줄여서 BZ 반응)이라는 유명한 화학반응을 이용한 용액의 색 변화를 촬영한 것입니다. 비디오를 보시면 주황색 용액 가운데 녹색 띠와 같은 것이 원형파를 그리면서 전파되는 것을 보실 수 있는데요, 실제로 어떤 물질이 흘러가는 건 아니랍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매스 게임과 같은 것이죠. 한 면에는 빨간색, 한 면에는 녹색이 칠해진 판을 들고 운동장에 애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선생님의 신호에 따라 어떤 애는 빨간색, 어떤 애는 녹색 면을 위로 쳐듭니다. 이걸 박자에 맞춰서 잘 조절하면 마치 색깔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볼 수 있겠죠? 똑같은 상황이랍니다. ^^

앞의 비디오로 돌아가면, 용액 속 분자들은 제자리에 서서 자신의 색깔만 주황색에서 녹색으로, 다시 주황색으로 바꿔주는 거라는 얘깁니다. 흥미로운 것은, 분자들의 이 매스게임에는 선생님도 없고 지도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분자들이 지 혼자 알아서 색을 바꾼다는 것이죠. 신기하지 않나요?

BZ 반응을 포함해 시간에 맞춰 알아서 색을 바꾸는 반응들을 '시계 반응(clock reaction)'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일반화학 실험을 할 때 이걸 한 번 실험해봤는데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시간마다 지 혼자 색을 바꾸더라고요. 이런 식으로요. :) 그래서 '시계' 반응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반응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혹시 화학을 좀 공부해보신 분이라면 "화학 반응은 평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라는 말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명제는 항상 성립합니다. 예를 들어, 종이를 태우는 반응을 봅시다. 종이가 타는 동안에는 계속 불꽃이 일고 타닥타닥 소리가 납니다만, 종이가 다 타버리고 나면 잠잠해지죠. 그 다음에는 뭔가 해주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걸 화학 반응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이에 불을 붙인 순간 이 녀석들은 평형에서 저만치 멀리 끌려가게 됩니다. 그럼 평형을 이루기 위해서 반응을 진행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종이가 계속 타는 과정입니다. 평형에 이르는 것은 언제일까요? 네, 종이가 다 타고 재만 남았을 시점입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죠. 이미 평형에 이르렀으니까요.

흥미롭게도 BZ 반응이 가능한 것은 "평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음... 뭐라고 비유하면 좋을까요. 시계추로 비교해볼까요? 시계추가 똑딱거리면서 계속 갈 수 있는 것도 평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죠. 시계추 입장에서 평형 상태는 가장 낮은 위치, 즉 정중앙입니다만 막상 그 위치에 도착했을 때는 관성이 있어서 반대쪽으로 올라가버리죠. 아래 그림에서 얘기하자면 3번 위치가 평형 위치입니다만, 1에서 올 때는 오른쪽 방향으로 관성이 있어서, 5에서 올 때는 왼쪽 방향으로 관성이 있어서 거기 안 멈추죠.


마찬가지입니다. BZ 반응에서도 상태가 두 개(주황색 상태, 녹색 상태) 있고요, 각 상태의 중간 어디메에 평형 상태가 있습니다. 주황색 상태에서 녹색 상태로 갈 때나 녹색 상태에서 주황색 상태로 갈 때는 이미 '관성'이 붙어버려서 중간 어디메에 멈출 수 없고, 결국 계속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게 되는 것이지요. 화학 반응 중에도 이런 것이 있다니 참 재미있지 않나요? :)

p.s. 쵸큼 어려운 얘기: 제가 지금 상미방 수업을 들은지 한참 되어서 용어는 다 까먹었습니다만, 비선형 상미방의 해를 찾기 위해 trajectory를 그리면 어떤 경우에는 한 점으로 수렴하고 어떤 경우에는 발산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빙글빙글 도는 폐곡선을 만들죠. BZ 반응은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들의 농도를 미지수로 두고 미방을 풀어보면 정확히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1]. :)
by 로보스 | 2008/12/15 17:20 | |과학|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6)
트랙백 주소 : http://lovos.egloos.com/tb/217184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世界はネオハピ! at 2009/10/06 16:57

제목 : 진동 반응 - 화학적 파동 (1).
누군가가 번역을 해달라고 -_- 청탁을 하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무보수...; 일전에 쓴 BZ 반응.과 정확히 연결되는 글입니다. 영어 원문은 여기로. 진동 반응 - 화학적 파동 G. Dupuis, N. Berland (Lycée Faidherbe LILLE) 한국어 번역: 로보스 개요 주제 식물이 생장하거나 배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과 분자들이 고도로 조직......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일리야 프.. at 2009/09/28 23:08

... 에서 속도론 쪽을 배우면서 진동 반응(oscillating reactions), 화학 카오스(chemical chaos) 등을 공부했었다. 그 때 배운 주제 중 하나인 BZ 반응에 대해 글을 하나 쓴 적도 했는데, 여하간 나에겐 굉장히 흥미로운 분야이다. (근데 앳킨스 이 생퀴가 8판 오면서 다 빼버렸다 T_T) 헌데 특별히 이 분야에서 ... more

Commented by wolga at 2008/12/15 17:43
재밌네요. 동심원을 그리는 것처럼 퍼지는 것도 신기하고요. 다양한 색깔을 내는데 모두 평형 상태라는 것도 신기하고...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15 17:54
wolga님// 재미있지 않습니까 ^^ 저도 물리화학 시간에 이거 배우고 완전 깜놀했던 기억이 있어요. 헌데 "모두 평형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걸까요?;; 제가 볼 때는 모두 평형 상태라기보다는 들뜬 상태 1과 들뜬 상태 2인데 평형 상태로 못 흘러가는 거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a 물리학도의 생각은 어떠신지 여쭤봅니다.
Commented by _tmp at 2008/12/15 22:54
이거 어떻게 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Commented by wolga at 2008/12/16 07:52
평형 상태라는 표현에는 조금 어폐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식을 봐야 알 것 같습니다ㅎ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16 09:10
_tmp 선배님// 제가 끝에 붙여놓은 링크 [1]을 따라가면 식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만, 그 식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요? ^^;

wolga님// 제가 비선형 동역학 용어들을 잘 모르는지라, 이런 경우에도 '평형'이라는 말을 쓰는지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ddd at 2008/12/16 12:36
비평형 통계 열역학이라는 게 있죠. 프리고진의 "order out of chaos"라는 책에 이런 것의 유명한 예로 나옵니다. 평형은 phase space에서 한 점(fixed point)로 수렴하는 걸 말하는데, 비선형 동역학에선 limit cycle, strange attractor 등 복잡한 와중에도 어떤 구조를 갖는 것들이 있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16 13:23
ddd님//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사상 at 2008/12/16 17:01
밸리에서 미리보기로 봤을땐 분명 진동하는 추 그림인데 옆에 글엔 화학이라고 적혀 있어서 궁금해서 들어와봤습니다 ^^;;

신기한 반응이네요. 그런데 위쪽 비디오를 보면 원이 무작위로 생기는게 아니라 특정한 점에서 계속해서 동심원이 생겨 나가는데 이건 왜 그런걸까요?

음, 그리고 해당 반응이 추와 같은 반응이라면 감쇄력 같은건 없나요? 왠지 시계반응에서 반응 속도가 점점 느려지면서 결국 평행 상태로 가야될것 같은데, 정확한 시간마다 색을 바꿔간다니 신기하네요..

음.. 쓰다보니 신기하네요 밖에 없는것 같은데, 하여튼 재미있는 포스팅 감사합니다 ^ㅡ^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16 18:08
사상님// 반갑습니다 ^^ 제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집어주셨네요.

우선 기본적인 개념을 다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BZ 반응은 상당히 '안정적'인 반응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 번 이 반응이 시작되면 어지간해서는 멈추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분자라는 녀석들은 사실 꽤나 거친(!) 녀석들이라,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죠. (쉽게 말해 미친 개 같은 놈들입니다 -_-;;) 따라서 한 번 '똑딱' 하고 와도 농도라든지 온도라든지 하는 물리량들이 항상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안정적'이라는 말은 이런 물리량들이 약간씩 변화해도 반응 자체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이 반응은 촉매 반응입니다. 옆에서 한 녀석이 반응을 시작하면 그 옆의 녀석도 그로 인해 반응을 일으킬 수 있죠. 이런 개념들을 기반으로 놓고 보면 동심원을 그리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한 분자가 반응을 시작합니다. 한 번 반응에 들어온 분자는 계속 똑딱거리기 때문에 그 분자는 계속해서 반응을 일으키죠. 한편, 그 이웃에 위치한 분자들은 이 녀석의 영향으로 반응을 시작하게 됩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후에는 계속 똑딱거리게 됩니다. 한 분자에서 그 이웃 분자로 '영향력'이 전파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결국 동심원 무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감쇄력 얘기도 앞서 설명드린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계추 비유는 상당히 거친 비유라서 완전히 동일한 개념이라고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 분자의 입장에서 감쇄력이라면 농도나 온도 등이 변하는 것일텐데, 이 반응은 상당히 안정적이기 때문에 작은 감쇄력이 존재할지라도 다시 제 위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물론, 농도 변화나 온도 변화가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다른 데로 빠져서 평형 상태로 가버립니다. 동영상을 보시면 동심원을 계속 만들어내다가 멈춰버리는 '중심'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죠. 이 녀석들은 평형 상태로 빠져버린 녀석들이랍니다. 제 설명이 충분했는지요? ^^
Commented by 사상 at 2008/12/16 21:03
넵.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__) 꾸벅~
Commented by ddd at 2008/12/17 09:17
좀 더 발전하면, 자기촉매란 게 있어서 지네들 끼리 잘 노는 시스템을 얘기합니다. 더 발전해서 DNA와 단백질이 그런 거라고 우기는 학파도 있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17 10:29
사상님// 별 말씀을 ^^

ddd님// 그러고보니 생화학 시간에 RNA world의 RNA가 그런 시스템이었을 거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네요. 소위 말하는 자기조립(self-assembly)과도 연결되는 이야기겠죠?
Commented by AFHR at 2008/12/19 12:01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화학 실험 수업에서는 애들이 좀 지루해하면 보여주고 선생님은 노는;; 방편으로 자주 쓰이는 반응이더군요. 웬만한 시계 반응들은 몇 번 반복된 이후 멈추게 되는데, 웬만해서는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제가 동역학...이라기보다도 물리 전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신기하게 보이는 점이려나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19 13:15
AFHR님// 그런... 가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이론을 설명하기는 만만치 않을텐데요.
Commented by AFHR at 2008/12/26 23:34
그게, 설명은 안 하고 보여만ㄱ- 줍니다; 뭔가 당황스럽지만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2/27 17:40
AFHR님// 허허허;;; 당황스럽군요. 뭐 그런 걸로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일게 된다면야...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즐겁게 살아야죠. :)
by 로보스
Calendar
메모장
카테고리
|소개|
|일기|
|감상|
|과학|
|잡념|
* 홈페이지 ('02-'03)
* 네이버 블로그 ('05-'06)
최근 등록된 덧글
omg님// 지금 퍼가는 걸..
by 로보스 at 11/22
검색하다 찾아와서 한참..
by omg at 11/22
비밀글// 뭐 이런 걸 비..
by 로보스 at 11/19
Bloodstone님// 명시되..
by 로보스 at 11/18
C++은 만져 본 적이 ..
by Bloodstone at 11/18
긁적 형// 저 같이 도덕적..
by 로보스 at 11/17
도덕교과서 즐겨읽는....
by 긁적 at 11/17
마법사의꿈님// 감사합니..
by 로보스 at 11/17
간단한 scheme 버젼 ..
by 마법사의꿈 at 11/17
lylm// 흐흐 전화한다더..
by 로보스 at 11/16
유키누나// 그건 너무 대..
by 로보스 at 11/16
Wookie님// 아 그렇군요 ..
by 로보스 at 11/16
음..난 루저니 위너니 보..
by Yuki37 at 11/14
좋으네 :) 아가씨가 계..
by lylm at 11/14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Wh..
by Wookie at 11/13
긁적 형// 아뇨 조원들...
by 로보스 at 11/13
긁적 형// 아... 뭐 그..
by 로보스 at 11/13
아가씨가 볼 책? ㅋㅋㅋ
by 긁적 at 11/13
그.. 그냥..;; 그런 코드..
by 긁적 at 11/13
긁적 형// ???
by 로보스 at 11/13
최근 등록된 트랙백
Scheme으로 루저 인증..
by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루져 테스트 [asp.net]
by 緣
루저코드 - 파스칼 버전
by Divine Power
루저코드 - C#
by 평범과 순수한 はるかぜ..
나 자랑하려고-
by Time to be brave,25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