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사이언스북스.

보통 화학과 학생들이 실험에 반해서 화학을 전공하게 되는데 비해, 나는 이론 때문에 전공을 택한 케이스다. 내가 전공을 택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교과서에서 분자와 원자를 배우면서였다. 이 복잡하고 다채로운 세상이 '분자'와 '원자'라는 간단한 개념으로 한 번에 설명된다는 것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매력은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아서, 이론화학을 배우면서 느끼는 그 희열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

'모델링'의 학문 물리학도 이런 매력을 풍부히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내가 그걸 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_-; 전공하기는 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신 이런저런 교양서들을 읽어나가고 있다. 이번에 잡은 책은 킹왕짱 미인 물리학자라는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 어디선가 추천을 보고 산 책인데, 막상 집에 배달된 책을 보니 그 두께에 압도되어 책을 잡을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얼마 전에 큰 맘 먹고 이 책과 출퇴근길을 함께 하기로 결정했고, 지하철에 서서 팔이 뻐근해지도록 책을 읽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읽어나갔다. 이 책은 그러한 나의 노고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입자물리학'의 최전선을 설명한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초끈 이론'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엄청난 친절을 베풀어 20세기 초반부터 역사를 되짚어오기 시작한다. 가장 초반,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 설명이 다분히 '교과서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말은 파인만처럼 독특한 설명을 제시한다기보다는 표준적인 설명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제시한다는 의미다. (양자역학 설명을 흑체복사, 광전효과, 컴프턴 산란으로 시작하니 뭐 말 다했지.) 이후에 등장하는 주제들은 내가 '교과서적인' 설명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이 상당히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부드럽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물리학을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표준 모형을 이끌어 내고, 표준 모형에서 발생한 계층성 문제와 그의 해결책 초대칭성 이론을 기술한다. 이어 이야기는 끈 이론으로 흘러들어가는데, 끈 이론에 여분 차원 이론이 첨가되고 초대칭성이 합쳐지는 것을 보면서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5부에서는 최신 이론들을 소개하는데, 마치 내가 최신 이론들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고퀄리티의 설명을 제시한다. 명강사는 학생이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는데, 이 책이 좀 그런 느낌? (가까운 예로 서동엽 교수님이나 길이만 교수님을 들 수 있겠다 ㅋㅋ)

이 책이 교양서라지만, 수업 부교재 정도로 활용해도 괜찮아 보인다. '표준적인 설명'을 워낙 잘 풀어 설명해놨기 때문에, 소립자물리학 같은 과목에서 활용하면 좋을 듯? 내가 핵·소립자물리학 수업에서 한 번 설명을 듣고, 노벨상 관련 신문기사에서 또 한 번 읽고, ExtraD님 블로그에 올라온 설명까지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_- 자발적 대칭성 깨짐(SSB)을, 이 책의 설명을 듣고 이해해 버렸다! (이라고 말하니까 좀 두려워서 한 마디 붙이면, '개념적으로' 이해했다는 겁니다. 개념적으로. 자세한 내용은 몰라요 -ㅠ- 아니 어쩌면 이해했다고 믿는 게 착각일지도... ㄷㄷㄷ) 앞으로 이쪽 과목을 들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들을 때 어떤 내용이 잘 이해 안 되면 이 책부터 찾아봐야겠다 ㅎㅎ

두께와 무게를 제외하면, 참으로 매력적인 책이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어떨까? 읽은지 오래돼서 직접 비교는 좀 어렵지만, <시간의 역사>나 <엘러건트 유니버스>보다 더 쉽고 친절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 생각해보니 이 책과 저 책들은 분위기 자체가 좀 다르기도 하다. 이 책은 주로 연대기순으로 주제들을 배열했기 때문에, 서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고 있다. 내가 이쪽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더 쉽게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굉장히 많은 걸 담고 있는 좋은 책 :)

@ 저자가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과 동창이라더라 -ㅂ-;
by 로보스 | 2008/11/26 17:17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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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11/26 17:19
아악 이렇게 또 지름신을 저에게 붙여주시면 어쩌란 말입니까..orz 저는 요즘 양자 세계를 여행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를 보고 있지요. 아직 조금밖에 못봤지만 그쪽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나저나 화학에 반한 계기가 이론이라니 반갑습니다. 수소원자궤도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화학과 간 1인-_-/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1/26 17:30
키오쿠님// 헤헷 뭘 이 정돌 갖고 ;) 말씀하신 책도 제법 유명한 것 같더군요.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화학 이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죠! ;ㅂ; 능력이 딸려서 이론 물리학을 공부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ㅠㅠ
Commented by Yuki37 at 2008/11/26 17:58
허허허 나도 이 책 있지. 근데 원서야 원서야 원서야 T_T 겨우 그 두께에 한글로 충격을 받으면 어쩌니!! ㅋㅋㅋ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1/27 10:16
유키누나// 헤헤헤헤 한글 책이 보통 더 두껍잖아!
Commented at 2008/11/27 12: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1/27 13:13
비밀글님// 아니 뭐 많이 읽는 건 아니고요 ;;; 저한테도 저 세계는 넘사벽이죠 ^^; 그저 담 너머서 힐끗거릴 뿐입니다 (_ _);
Commented by Sophsit at 2009/11/01 19:51
그 책을 2년째 보고 있어요.. 어서 오늘밤에도 진도를 빼야겠어요 ㅜㅜ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11/02 08:50
Sophsit님// 아흑 T_T 확실히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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