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성찰하는 진보>, 지성사.

진보(進步)라는 단어는 매력적이다. 현실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나가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그런 면에서 매력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두 단어, '성찰'과 '진보'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법학자인 조국 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정리해서 한 권으로 묶어낸 책으로, 본진은 진보에 두고 있지만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책이다. 책 제일 마지막 글꼭지에 보면 저자가 자기 자신을 '자본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인 한편, '민중주의자'이면서 '엘리트주의자'인 사람(사실 더 있다)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 역시 '균형'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불행히도 너무 '당연한' 말들만 가득 들어있다. 그 당연한 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야말로 안습-_-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설사 그 주장들을 실천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거, 당연한 거 아냐?"라고 말할 만한 내용들이란 말이다. 예컨대 "성매매는 성을 판매하는 당사자보다는 포주에게 모든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옳지 않다. 물론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과 같은 주장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성매매에 참여하는 남성이라 해도 동의할 만한 주장이란 말이다. 하긴,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려다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로 흘러갈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게다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짜깁기한 책이다보니 통일성이 없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쭉 이야기하면 좋을텐데, 같은 주제로 묶인 글들조차도 제각각이다. 원래 각각 끝을 맺은 글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큰 흐름이 없어서 아쉬웠다. 요새 이런 식의 책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단편적인 상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면, 특히 어떤 '주장'을 하고 싶은 책이라면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라는 식으로 비판했지만, 사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책이다. 그냥 웹에 올라온 잘 쓴 글들을 이쁘게 인쇄된 형태로 읽는다는 느낌? 특히 법학자가 쓴 책이다보니, 우리네 시각으로도 '옳지 않아' 보이는 법 적용에 대해 법학적으로 명쾌하게 비판해주는 부분이 신선했다. 또한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주제의 경우 저자가 쓴 전문적인 글들을 각주로 달아뒀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 있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진중권 식의 풍자와 해학도 괜찮지만, 이런 식의 이성적인 비판도 괜찮은 것 같다. 근데 이게 먹혀들어가야 말이지 -_- 보고나니 볍진 같은 정치인들 때문에 화딱지만 난다 젠장.
by 로보스 | 2008/10/30 10:56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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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8/10/30 23:11
당연하고도 훌륭한 이론이 현실에서 하나도 적용이 안 된다는 거대한 절망.

거참, 나에겐 정치 교과서가 태어나서 경험한 최고의 시뮬라크르였지요. TV랑 신문을 볼 때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헌법이 그 헌법이 맞다니.. 싶었지요. ㅋㅋㅋㅋ
Commented by 긁적 at 2008/11/01 00:47
교수님도 수업시간에 같은 말씀 하시더라고 -_-;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현대 시민사회에대한 선구적 주장이고, 현대에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지만, 그건 시민사회의 전통과 배경을 가진 애들한테나 적용이 되는거라고 -_-;;;;;;;;;;;;;;;;;;;;;;;;;;
대한민국은 아니라능.

덧붙여. 난 '현재의 대한민국에 한해' 민주주의가 옳은 제도가 아니라고 본다능.
국민이 그 통치체제에 적합하지가 않다능.

세상은 독재가 지배하리라! 으하하하하하하!!!!! (... 이님 좀.)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0/31 09:00
WizardKing// 결국 수없이 쏟아지는 책들과 웹상의 글들은 다 화려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싶네... 아무리 옳은 소리를 백날 떠들어봐야, 실현이 안 되는 걸 어쩌라는 -_-
Commented by Wookie at 2008/10/31 11:22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상은 이상일 뿐이니 현실에선 소용없다" 라고;;;;
저는 이상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무한히 근접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그래서 좀 충돌이 일어나는듯 해요 ㅠㅠ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0/31 14:08
Wookie님// 저 역시 진보가 가능하다고 봐요 ^^ 다만 정치인들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문제죠 -_-; '아래로부터의 개혁'만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긁적 at 2008/11/01 00:44
이게 먹혀들어가야 말이지 -_- <- 케케케공감.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1/01 22:54
긁적 형// 뭐 그렇죠 ㄱ- 현실은 시궁창... 하지만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 좀 그러네요 ㅎㅎ
Commented by AFHR at 2008/11/05 08:55
학교 도서관에 들어왔기에 읽어 보았습니다만, 결국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는 정론'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약간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지식인 계층이 결국 현실에 대해서 어떤 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당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1/05 11:58
AFHR님// 닉네임을 바꾸신 건가요?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만, 아직도 당위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죠 :)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이쪽의 당위와 다른 당위를 믿는다고 해야 할까요.
Commented by AFHR at 2008/11/05 12:29
그런 당위가 무지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무지에 대한 신봉'에서 비롯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그렇습니다 :)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1/05 15:59
AFHR님// 무슨 대상이든 신봉하는 태도는 위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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