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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서 리스트를 보면 철학 책들이 제법 있다. 어디 가서 얘기하면 꼭 '철학'에 관해 얘기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철학'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사'에 관심 있을 뿐. 위대한 석학들의 논리정연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깨달음의 흥분에 휩싸이기는 하지만, 나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해내지는 못한다.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엊그제 동생 하나를 만나서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거기서 또 설 Searle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잘난 척을 했다. 나 자신의 철학은 언제 정립될까.) 이 책은 '철학사'가 아니라 '철학'을 위한 책이다. 데카르트니 칸트니 하는 이름은 단 한 군데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당황스럽다. 얇고 쉽게 쓰여진 책임에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총 열 가지의 질문을 가지고 '철학적 사고'를 시작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취지인데, 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한 문단만 몇 번을 읽은 적도 있다. '철학사'에는 익숙하지만 '철학적 사고'에는 익숙하지 못한 엉터리 독서가의 비참한 말로랄까. 책에서 제시하는 열 개의 질문은 모두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다. 철학이라 하면 항상 두꺼운 철학사에 눌려 엄두도 못 내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각각의 질문이 커버하는 층위(layer)가 다르기 때문에 독자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맛볼 수 있다. 예컨대 처음 두 개 장에서는 '인식'과 '존재'의 문제를 다루지만, 네번째 장에서는 '언어'가, 여섯번째 장에서는 '도덕'이 논해진다. 인식과 존재에 대해 따지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도 언어나 도덕에 관한 논의에서는 얻을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가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다. '철학' 입문서로 이보다 좋은 책이 있을까. 대학교 철학개론 수업 교재로 딱 적합하다. 바라기는 이런 책으로 고등학생들까지 전부 공부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지만. :) 책을 추천해준 긁적 형[1]과 그의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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