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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유명한 사상가의 책을 직접 읽어본지 한참 된 것 같아서 아렌트의 저작 중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는 이 책을 잡았다. 책이 꽤 두껍고 읽기 쉬운 문체가 아니어서 (번역의 문제일까?) 끝내는 데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의 가치를 하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은 주로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아이히만의 삶과 제 3제국에서 한 일, 그리고 그의 재판 과정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저자의 시각에서 재구성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하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할 방법이 있기는 할까?) 저자는 이 사실(史實)들을 모아 "왜 아이히만은 그렇게 행동했는가?"에 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귀결된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판단의 규칙을 마치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언어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다소 제한된 양의 관용구에다 몇 가지 새로운 것들을 추가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 그 관용구 가운데 어떤 것도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전혀 어찌할 수 없었다. (뒷표지) banality를 '평범성'으로 번역하는 데에는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용어는 아이히만이 악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조커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진부함'이라고나 할까, 일반적인 세계에서 악으로 규정된 것이 선으로 규정되어 너무도 익숙하게 자행되는 사회를 가리킨다. 저자는 책에서 끊임없이 이 점을 강조한다. 아이히만은 그저 제 3제국의 공무원으로 '준법적이고 성실하게' 살았을 뿐이다. 아이히만에 대해 판결을 내린 이스라엘 대법원은 그걸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오해가 없길. 이것이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때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226쪽) 쿤의 용어를 빌리자면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 할 수 있을까. 같은 행동에 대해서, 한 사회에서는 '윤리적'이라 판단하고 다른 사회에서는 '비윤리적'이라 판단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 쪽에서 다른 쪽을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까? '윤리의 기준'이 한 사회의 관습이나 문화라면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류에 해악을 끼치는 국가 집단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비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의 기준이 인간의 보편적인 합리성이라면[1],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을 정립할 수 있을테고 그로부터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루살렘 법정은 어떤 쪽을 택했을까? 이 문제는 에필로그와 후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문제 중 하나로, 예루살렘 법정은 아이히만이 인류에 지은 죄를 크게 부각시켜 인류 공통의 합리성에 호소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이히만이 전체 인류에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유대 민족의 재판정'에서 재판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응당 국제 사법소 등 중립적이고 초국가적인 기관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 어째서 유태인들이 그를 재판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재판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고 있는 아이히만을 '납치'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다. 이것이 '인류에 지은 죄'를 지고 있는 범인을 재판하는 타당한 절차일까? 저자는 이런 점들을 지적하면서 예루살렘 법정에서 내려진 판결이 '올바른' 판결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아이히만은 그저 '유태인들에 대한 죄'를 지고 죽어간 것은 아닐까.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군사 정권 시절 '성실하게' 일하던 중정 분들이 아이히만 위에 겹쳐져서 더욱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뛰어난' 생각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제 3제국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이 책의 흠이라면 조금 부족한 번역 정도? 예를 하나만 들자면, 책의 모든 "끔찍한"은 "끔직한"이라고 나온다 -_-; 알라딘에는 번역을 이유로 엄청난 혹평을 가하는 분도 계셨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그냥 쵸큼 허접한 번역 정도라고 해두자. 괜찮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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