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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비전문가는 흔히 쿤과 포퍼를 이해할 때 쿤은 진보, 포퍼는 보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포퍼는 과학이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믿었고, 쿤은 과학을 바라보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설령 본인은 거기에 반대했다 하더라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작들에서 드러나는 포퍼의 완고한 태도는 더더욱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믿게 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다. 쿤이야말로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포퍼는 진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포퍼의 과학철학은 '과학'철학이 아니라 과학'철학'이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포퍼의 과학철학은 그의 철학적 사유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과학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포퍼의 철학이 무엇인가? 그의 주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드러나듯, '열린 사회'를 옹호하고 '역사주의',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포퍼의 철학이다. 포퍼는 고대 아테네의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이상향으로 삼았고,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던 그 사회에 거대한 철학을 도입해 사회의 숨통을 막아버린 플라톤을 증오했다.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 역시 플라톤과 같은 부류로 보아 비판했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포퍼의 사상이 단순한 '좌파'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포퍼는 마르크스마저도 권위자로 세우기를 거부한, 참으로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포퍼였기에, 과학계를 바라보는 그의 철학 역시 '열린 사회'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과학계에 어떠한 권위도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과학자들 개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각 개별 과학자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때 그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여하한 권위도 여하한 인간적 기준도 있어선 안 된다고 믿었던 포퍼였기에, 그 근거는 '자연'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모든 과학자는 어떠한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그저 '자연'을 근거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발표한다. 이러한 포퍼의 과학계에선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가 발표한 이론이라도 듣보잡 과학자 로보스가 '반증'을 찾아내기만 하면 완전 뒤집힐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열린 사회'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는데, 포퍼는 '역사주의'에 반대했다. 즉, 역사적 흐름에 따라 '발전'한다는 시각에 반대했다고 볼 수 있는데, 과학이 진리에 점근한다는 개념은 일종의 역사주의로 볼 수 있지 않나? 물론 포퍼가 반증주의를 주창한 속뜻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반증주의로부터 거의 필연적으로 유도되는 생각일 것 같은데. 음... 내가 역사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쿤은 어땠는가? 잘 알려져있다시피 쿤은 하버드에서 물리학 Ph.D.를 받았다. 즉, 포퍼는 철학자였지만 쿤은 과학자였다. 따라서 쿤은 포퍼만큼 철학에 집착하지 않는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자기가 겪어본 과학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고, 이론에 어떤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쿤이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쿤은 과학계를 지배하는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학 혁명기'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상과학' 상태에서는 그 권위에 굴종해야 하는 것이다. 포퍼가 '위대한 과학자'에서 빼앗은 권위를 쿤이 다시 '과학자 사회'로 돌려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과학철학과 과학사/과학사회학이 같은 '과학학'으로 묶이면서도 다른 길을 걷게 됨을 짐작할 수 있다. 과학사학자들이나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이 '현재 어떻게 굴러가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 헌데 실제로 과학 연구에 과학자 사회가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반증 이론보다는 패러다임 이론이 좀 더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쪽 진영에서는 패러다임 이론을 택해서 그쪽으로 연구를 할 것이다. 반면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굳이 패러다임 이론을 택할 필요가 없다. 포퍼/쿤 세대의 뒤를 이은 과학철학자 라카토슈와 파이어아벤트의 경우에도 쿤의 이론을 보수적이라는 점에서 비판했던 걸 돌이켜 보면, 역시 과학철학은 '철학'인 것이다. 이미 서평 치고는 제법 긴 글이 되었지만, 책 전체를 제대로 요약한 것은 아니다. 책의 후반으로 넘어가면 아도르노와 포퍼의 관계, 하이데거와 쿤의 관계 등을 논하면서 다분히 '철학적'인 관점에서 둘을 분석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부차적인 문제라 생각해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간단한 요약만으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관점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앞부분에서 포퍼와 쿤을 논할 때도 철학적인 입장에서 평가한다. 그러니 쿤에 대한 평가가 박하리라는 것 쯤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포퍼나 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둘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책은 처음이었다. 책에서도 포퍼와 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 반기를 든다고 하던데, 그만큼 흥미로웠다. 역시 두 명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포퍼를 분석한 <비트겐슈타인은 왜?>와 비교해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왜?>에서는 두 사람의 삶을 자주 제시하면서 '배경적'인 부분을 많이 설명하려고 한 데 비해 <쿤/포퍼 논쟁>은 다분히 사변적으로 쓰여졌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얻을 것이 많은 책이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도전해보시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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