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세이어, <사회 과학 방법론>, 한울.

사회과학에 대한 실재론적 철학과 방법론을 소개해놓은 책으로, 존경하는 황화미남 선배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부쩍 성숙했다는 느낌이 든다.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여러가지 지식들이 차곡차곡 정리되는 느낌. 일례를 들어, 나는 과학사회학의 목표가 '과학이 상대적이다'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학문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과학 연구'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림판으로 그렸더니... 죄송 -_-;)

S는 주체를, O는 객체를 의미한다. 간단하지? '독립된' 주체가 '독립된' 객체를 관찰하는 거다. 반면 극단적 상대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객체 O를 보더라도 각자 다른 객체 O1, O2, O3, ...를 발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개의 그림이 모두 틀렸다고 얘기한다. 전자를 반박하는 것이 '사회학적' 입장인 것이고, 후자를 반박하는 것이 '실재론적' 입장이다. 저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나눠서 설명하는데, 자연과학의 경우는 다음 그림과 같다.

가는 실선은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쿤의 용어로 하자면 '패러다임'이다. 아무리 과학자가 솔플로 연구를 한다 해도, 과학자는 '과학자 사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연구 방법이나 논리 전개법 등에 있어서는 과학자 사회가 정한 바에 따라야 하니까. 그걸 안 지키면 양동봉이 되는 거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골렘> 등의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쪽을 참조하시길. (사실 이 책의 저자는 사회과학자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과학에 대해 오해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논지 전개에는 별 문제가 없으므로 따로 지적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를 통해 '과학사회학자'들이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또한 저자는 상대론적 입장을 반박하며 '단일한 실재적 객체'를 주장한다. 철학적 깊이는 별로 없는 것 같아 여기서 굳이 다루지는 않겠다.

한편 사회과학을 그려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대상 자체가 여러 객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된다는 그림이다. 저자는 이 점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자연과학의 대상은 홀로 존재하기 때문에 '분리'해서 관찰하기 쉬운 반면, 사회과학의 대상은 상호작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과학에서는 변인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자연과학의 접근법과는 완전 다른 접근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 논의한 저자는 이제 이 논의를 기반으로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의 관점은 대부분 논리실증주의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저자는 '반증가능성(falsibility)'이 과학을 과학답게 만들어준다는 포퍼주의에 반대하고, 아무리 귀납이라도 반복해서 관찰이 이뤄질 때는 신뢰성을 가질 수 있다고 설파한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논리실증주의자의 연역과 귀납 외에도 '인과'라는 새로운 추리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인데, 저자는 대상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힘' 내지는 '성질'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일들은 연역으로 논리만 가지고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귀납적으로 지식을 모아 알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분류를 도입한 것이다. (왠지 칸트의 '선험적 종합 판단'이 떠오르는데?) 저자는 이 '인과'가 가장 쓸모있는 지식이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며, 이 '인과'를 알아내는 방법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외에도 사회과학에 관한 유용한 지식이 많이 실려있지만, 대충 이 두 정도에 초점을 맞춰 서평을 정리하려 한다. 우선 저자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눠놓은 것부터 얘기해보자. 저자의 기준에 따르면 심리학은 자연과학인가, 사회과학인가? 저자는 책에서 심리학이 사회과학의 일부인양 묘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인지심리학은? 동물행동학은? 저자가 제시한 그림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아마 입자물리학은 저자가 묘사한 '자연과학'의 그림에 맞아 들어갈 것이고, 인류학은 저자가 묘사한 '사회과학'의 그림에 맞아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학문들은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난 자연과학-사회과학의 분류는 고전적인 학문 분류의 찌꺼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분류법도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이번엔 이 책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저자는 실재론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모로 애쓰고 있는데, 내가 볼 때 그 깊이가 그리 깊지 않다. 거의 상식적 실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한 느낌. (전적으로 허접한 아마추어의 생각이니 철학을 하신 분들이 확인해주셨으면 좋겠다.) 따라서 이에 따라 연쇄적으로 줄줄 딸려오는 여러 논의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가 없었고, 대상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힘' 내지는 '성질'이 있다는 것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명을 위해 '인과 추리'라는 새로운 추리를 도입한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저 논리실증주의의 아류작으로밖에 안 보인다.

-라고 열심히 까댔지만, 사실 사회과학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꽤나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실재론적 관점의 사회과학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괘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은 반골은 기분이 좀 상할 수 있겠지만 ^^; 아, 책을 읽기 전에 한 가지 각오하실 것. 번역해놓은 걸 보고 있으면 많이 괴롭다. 같은 문단을 몇 번 되돌아가서 읽었는지 모른다 -_- 뭐, 어쨌든 잘 쓴 책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바라건대 누군가 이 책을 읽고 나와 토론을 해줬으면 좋겠다 :)
by 로보스 | 2008/08/29 17:00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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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8/29 21:03
재미있는 책 같아 보이네요.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D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드네요. 포퍼 아저씨 까다니 저자도 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ㅎㅎ 저도 '인과추리'는 유용하다고 느끼면서도 별로 안좋아하지 말입니다-_-....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8/30 23:55
키오쿠님// 재미있습니다 :D 번역이 땅그지 같지만... -_-;; 키오쿠님이 읽어보시고 평을 올려주시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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