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오스트리아 가서 열심히 읽은 책. 한국현대사에 대해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잡았다. 그건 그렇고 저자가 꽤 유명한 분인듯. 곳곳에서 한국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고. (근데 왜 자꾸 브루스 윌리스라고 튀어나올까 -_-;;)

다른 것보다 저자의 '넓은 시야'에 감탄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넓게넓게 본다. 현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저 멀리 조선왕조까지 소급시켜서 설명하기도 하고, 국지적인 사건으로 보였던 것을 전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어차피 역사학의 '해석'이라는 것은 참이냐 거짓이냐보다는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므로, 이와 같은 해석이 나에게는 참 매력적이고 참신하게 다가왔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요즘 왕왕 들리는 얘기로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지나치다- 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대학 입시에 목숨 거는 학생들을 보면서, 대학에 가는 것이 기본값이 되어버리도록 대학 정원 수를 늘린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최근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조선왕조 때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대로,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 하여 '학자'를 가장 높은 직업으로 쳤다.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학자가 되어야 했다. 비슷한 유교 전통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근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물론 이 전통이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근대 중국을 지배했던 청나라에서는 이런 모습이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이 전통이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계승된 것이 높은 교육열로 나타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한국 사회의 중심 키워드를, 저자는 '유교'로 본다. 앞서 언급한 사농공상도 그렇지만, '부권'과 '가족'에 대한 강조도 그렇다.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북한이나 우리나라나 독재자가 내세우는 가치는 '가족국가주의'였다. 지도자는 자애로운 아버지고 국민들은 서로 형제자매인 것이다. '어버이 수령님'을 받드는 북녘도 그렇고, '국부(國父)'를 그리워하는 남녘도 그렇지 않은가.

또 다른 예로, 6.25 전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들 수 있겠다. 저자가 유명해지게 된 것도 6.25 전쟁에 대한 참신한 해석 덕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특히 '김일성 전적 책임론'에 반대하는 해석이 독특하다. 당시 국제 정세와 남한의 사정을 세밀하게 기술하면서, 6.25 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깝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도 계속해서 북을 선공하길 원했고, 38도선 근처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김일성이 남침을 개시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이라도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겠는가. (뭐 이런 주장을 해서 우리나라 보수 진영으로부터 무진장 두들겨맞은 모양이다 -_-;;)

박정희의 10월 유신에 대한 해석도 참신했다. 나는 그래도 정상적으로(?) 권좌에 오른 한 명의 지도자가 '맛이 가서' 독재를 휘두르기 시작한 사건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 국제적인 정세는 대한민국에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점점 냉각되면서 박정희가 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미국의 꼭두각시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극단적인 조치를 통해 미국의 손을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지금 책을 읽은지 좀 되어서 상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시기 박정희 정부의 외교술은 정말 현란했다. 미국 정부 내의 여러 기관들을 서로 이간시키면서 필요한 사람들은 한국 편으로 포섭하는.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내가 10선 찐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JP라는 것도 놀라웠고. 2mb 이 병신은 부시 카트 탄 거 자랑하지 말고 이런거나 좀 배웠으면 좋겠다.

아마 내가 놀라워한 이런 내용들은 역사학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방법론일 것이다.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로 접근하는 것이 현대 인문과학의 대세니까. 하지만 막상 그 방법론을 적용해서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해석하는 걸 보니 그 매력이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반공교육의 끝물에 서 있는 세대고, 아직까지 국수주의와 민족주의가 횡행하는 사회에 속해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를 한 걸음 물러서서 보기 힘들었는데, 이 책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아차, 책 중간중간 언뜻언뜻 비치는 저자의 한국 사랑이 무척 인상적이다. :D 이 책을 소개해주신 미리내님과 미리내님의 한국사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_ _)

@ 그건 그렇고, 여기 가보니 덧글 중에 "박명림의 박사학위논문으로 커밍스는 끝"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자세한 스토리 아시는 분 제보 부탁드립니다 (_ _)//
by 로보스 | 2008/07/24 16:02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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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7/24 16:09
Commented by 시엔 at 2008/07/24 17:08
웬지 구미가 마구 당겨주는 책이군요
한국가면 꼭 봐야할 책 리스트에 넣어야 겠군요
+_+ 로보스님이 언제나 책을 이것저것 많이 보셔서
저도 상당히 도움받고 있답니다 ㅎㅎ~
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7/24 17:34
커밍스의 책은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역사 수업 시간에 읽을 기회가 있었지요. <한국전쟁의 기원>도 좋은 책입니다 :) 근데 커밍스의 경우는 수정주의 학파에서 워낙 저쪽으로 나간 나머지 -ㅠ- 요즘은 그에 대한 비판도 제법 많이 나온다지요. 책을 쓸때 (냉전 중이었던가) 알지 못했던 소련 및 구 공산권 측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그의 주장에 일부 비약이 발견되기도 했었고요. ㅎㅎ 역사 쪽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역사비평사의 계간지 <역사비평>을 추천드립니다. 재미있는게 많아요 ^_^
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7/24 17:36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그래도 열심히 커밍스를 경배/ㅁ/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사실 좋아하고요:$) 가끔은 커밍스랑 반대로 확 나가면서도 그만큼 탁월한 시야와 역사감각을 보여주는 학자의 책은 없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다음에 혹시 찾게되면 트랙백을 하도록 할게요. 덕분에 좋은 책 다시 뽐뿌질받고 갑니다 /ㅁ/
Commented by Asuka_불의넋 at 2008/07/25 00:08
작년에 인문발표 원고 쓰느라 읽다 만 책입니다만, 시간나면 끝까지 찬찬히 읽어봐야겠네요. 매번 책 소개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8/07/25 00:50
보려고 생각만 하고 있던... 그 책이군요.

@ㅁ@ 혹시 지난 번에 말씀하신 호남 차별의 기원론도 이 책이 소스인가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7/25 08:37
시엔님// 재미있는 책입니다 ㅎㅎ 좀 두껍지만;;; 제 서평이 도움이 된다니 영광입니다 (_ _)

키오쿠님// 고맙습니다 :D 저는 이쪽에 완전 뉴비인지라 키오쿠님 같은 분의 말씀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됩니다 +_+ 커밍스 춈 멋진 거 같아요!

Asuka님// 조금 길어서 바쁜 고등학생에게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 ^^; '시간나면' 천천히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

WizardKing님// 넵 그렇습니다 ^^ 지식이 워낙 일천하다보니 소스가 금방금방 들통나네요 ㅎㅎㅎ;
Commented by Pelican at 2008/07/25 22:04
박노자가 말하던 브루스 커밍스군요.

한 다큐멘터리에서 1950년대 미국 관리가 증언한 내용이 생각나더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이승만의 북침론은 의도된 허풍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승만이 북침을 주장해서 미국이 한참 곤란했는데, 이승만이 그런 취지의
메모를 적어 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듣기론 그 당시 남의 군사력은
미군의 도움없이는 결코 북한을 침공할 수준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국지전이 많았고, 이승만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해도,
전쟁은 어쨋든 군 최고 권력자의 "결정" 없이는 날 수 없죠.
(오마이뉴스 기사의 누군가도 말했지만)
(커밍스씨는 군대 안 갔다 왔나? ㅋ)

제가 요즘에 드는 생각은 역사를 볼 때도 컨텍스트를 봐야 하듯이,
어떤 학자의 성과를 볼 때에도 컨텍스트를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브루스 커밍스란 학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어디에서 연구비를 받았는지,
어떤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가족에서 몇 째 인지 등등...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8/01 00:08
Pelican님// 방문 감사합니다 :D 제가 휴가 중이라 답이 늦었네요.

제가 커밍스의 학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왜곡/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전 책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제가 이해한대로 변형해서 올리기 때문에요 ^^; 제가 이해하기로 커밍스의 학설은 "이승만이 북침을 했다"보다는 "당시 국제정세상 한국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에 가깝습니다. 김일성 전적남침론에 반대되는 의견이라 많이 두들겨맞았던 거고요.

커밍스를 볼 때 컨텍스트를 봐야 한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사람이란 게 자신의 컨텍스트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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