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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 블로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지젝'이라는 닉네임의 철학도(?)가 한 분 계셨다. 그 분 블로그(지금은 휴지기)에 가면 맨 위에 "슬라보예 지젝 아닙니다 ^^;;"라는 글귀가 쓰여있는데, 이걸 보면서 슬라보예 지젝이 누군지 참 궁금했다. 그러던 중 알라딘에서 Critical Thinkers 시리즈를 접하게 되었고, 그 첫번째 책이 지젝인 걸 보고 호기심에 질렀다. 아, 후회 없다. 정말로 후회 없다. 원문도 최고고 번역도 최고다.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보면 나의 이런 선택이 좀 한심해보일지 모르겠는데, 나 같은 개양민조차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다니 정말 대단한 책이다 ;ㅁ; 지젝은 물론 라캉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도 대충 그럴싸한 헛소리를 나불거릴 수 있는 수준 정도까지 가르쳐줬다 ;ㅁ;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왜 지젝인가? 01_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02_ 주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03_ 포스트모던의 끔찍한 탈근대성 04_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 05_ 같은 행성에서 온 남성과 여성, 그 사랑의 이데올로기 06_ 인종주의는 왜 항상 환상인가? 지젝 이후 지금 지젝은... |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 서문(왜 지젝인가?)과 결문(지젝 이후)을 제외하고 본문을 살펴보자면, 1장에서는 지젝의 배경 -- 헤겔, 마르크스, 라캉 -- 에 대해 지젝의 철학과 연관지어 설명해준다. 2장부터 4장에서는 지젝 철학의 맥을 잡고, 5장과 6장에서는 성 이데올로기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지젝 철학을 적용한다. 제일 끝에 붙은 '지금 지젝은...' 장은 지젝이 한국어판 발간을 축하하며 특별히 보내준 미발표 원고라고 한다. 이전 글에서는 지젝의 라캉 독법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지젝의 헤겔 독법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련다. 헤겔이라고 하면 보통 변증법(dialectic)을 떠올린다. 철학 전공이 아닌지라 이걸 헤겔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세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이 변증법을 가지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어냈고, 동방신기는 <'O'-正.反.合.>을 만들었다 -_-; 사실 변증법 자체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소피스트(sophist)들이 즐겨 썼다고 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동방신기가 이미 발표했듯이 -_-) '정, 반, 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매우 거칠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명제(正; thesis)라 불리는 하나의 명제가 존재한다. 그러면 이에 반대하는 반명제(反; antithesis)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두 명제의 갈등 상황에서 두 명제를 모두 통합할 수 있는 합명제(合; synthesis)가 등장하여 갈등을 종식시킨다. 헤겔은 이 변증법을 통해 칸트 철학의 문제점을 보수했고 '역사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젝은 헤겔 변증법을 조금 다르게 읽는다. 지젝이 파악한 변증법은 다음과 같다. 정명제가 등장하고 이에 대한 반명제가 등장하면, 둘을 화해시키는 합명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명제가 더 강화된 형태의 합명제가 등장한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예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는 그 세가 미약했다. (正) 그런데 로마의 대규모 박해가 시작된다. (反) 이 박해는 기독교의 세를 축소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훨씬 확장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의 세력은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이른다. (合) 이러한 변증법을 바탕으로, 지젝은 "이교도가 있기에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다!"라는 사뭇 모순된 명제를 선포한다. 여기에 마르크스의 '실천'과 앞서 소개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짬뽕되면서 지젝 철학을 이루게 된다. 지젝은 "누구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는 있다"며, 프로이트와 라캉을 인용해 이데올로기의 '균열'이 있음을 설명한다. 이 균열은 상상계에 의해 덮이지 못한 실재계의 일부로, 이 '균열' 속에서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약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지젝의 논리다. 이데올로기에 완전 묶여있다는 주관주의와 이데올로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객관주의를 적절히 조화시킨 논리로 보인다.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듯이, 아직 지젝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MTV 철학자라는 그의 철학은 깊이 있는 동시에 친숙하다. (지젝은 대중문화 -- 영화, 노래 등 -- 를 들어 자신의 예로 삼는다.) 일독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웠고, 하마터면 모른채로 지나갈 뻔 한 철학자 한 명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맨 뒤에 보면 지젝의 저작들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으니 더 깊이 공부하실 분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관심있는 분들, 한 번 도전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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