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발자국>, 마음산책.

내가 고종석 씨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감염된 언어>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대학에 합격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 쌩뚱맞게도(?) 언어학에 버닝하는 바람에 그 때 언어학 관련 도서를 무지 열심히 찾아다녔더랬다. 아마 <감염된 언어>도 그 즈음 읽은 게 아닌가 싶은데. "일본어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라는 주장에 대해 언어는 원래 주위 언어로부터 '감염'되기 마련이라면서 도리어 이런 감염이 언어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저자의 시각에 큰 인상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고종석 씨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이 책은 완전 실패다. 고종석 씨에 대해 완전 실망해버렸다.

이 책은 <한겨레>에 실린 글들을 모아서 만든 책으로, 1년의 하루하루에 대해 그 날 태어났거나 죽은 사람, 혹은 그 날에 발생한 사건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저자 자신의 생각도 포함되어 있고. 뭐 모르는 사실들도 많이 배우고 좋다.

그런데 좀 짜증난다. 너무 잘난척한다. 누가 "보수 세력은 생각이 재수없는데 진보 세력은 인간이 재수없어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딱 그 짝이다. 진짜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심지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라부아지에 처형사건 등 '이 사람이 도대체 이거 제대로 알고 쓴 건가?' 싶은 이야기들도 나온다. (라부아지에 처형 관련해서는 역시나 '세금 징수원이었기 때문 ㄳㄳ'라는 허접한 이유를 제시한다 짜증 -_-) 그냥 자기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난삽하게 모아놓은 책 같다.

이 글들이 잘난척 용도로 쓰였다는 점은, 그 날의 주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갖다붙인 곳에서 더욱 자명하게 드러난다. 뭔가 건덕지만 있으면 갖다 붙이는데, 난 읽으면서 쌩뚱맞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막 짜증이 났다. 하나 보여드릴테니 한 번 판단해보시라.

택시미터 05.01.
1936년 5월 1부터[sic] 조선에서 택시 요금의 미터제가 실시됐다. (중략) 택시운전기사 출신의 한국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지난 1995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낸 홍세화 씨일 것이다. 세칭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이 터진 1979년부터 프랑스에서 망명자의 삶을 살아온 홍세화 씨는, 택시운전기사 경험을 중심으로 아웃사이더적 반생을 되돌아본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발길이 닿을 수 없었던 조국에서 수많은 독자를 얻었다. 그는 2002년 초 완전히 귀국해 그 뒤 한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143쪽)

난 택시미터에 대한 설명을 원했지, 가장 널리 알려진 택시기사를 원하지 않았다. 도대체 홍세화 씨가 택시미터랑 무슨 상관? 다음 예는 더욱 쌩뚱맞다. 이거야말로 '잘난척하기 위한 용도'!

홍콩 반환 07.01.
1997년 7월 1일 영국령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중략) 광둥어는 베이징어에 견주어 중세 중국어의 특질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광둥어 사용자는 4천만 남짓으로 중국어 사용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할 수 없지만, 동남아시아나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해외에 사는 중국인들 다수가 광둥 출신이어서 중국 바깥에서는 베이징어 못지않은 위세를 떨치고 있다.
(209쪽)

홍콩에서 광둥어가 사용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광둥어에 대한 설명에 1/3 이상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우와- 그래요 님 역사도 잘 알고 언어도 잘 아시네요 님 쫌 짱인듯! 근데 도대체 광둥어랑 홍콩 반환이랑 무슨 상관?

더욱 짜증나는 것은 곳곳에서 보이는 편협한 시각이다. 특히 일본을 아니꼬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은 난숙한 자본주의와 최첨단의 학문, 기술이 원시사회의 유치한 신화와 어우러져 있는 야릇한 나라다. 다수의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바에 따르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인 진무神武 천황이 즉위한 것이 기원전 660년이고, 히로히토는 진무의 124대 직계손이다. (17쪽)

일단 '다수의 일본인들이 믿고 있다'는 말의 근거는 뭔지? 설령 일본인들이 그렇게 배워서 그렇게 알고 있다 치자. 그 나라에 신화가 있고 그걸 공교육에서 가르친다는 이유로 '야릇한' 나라라고 부르는 건가? 난 기원전 2333년에 곰과 신의 아들내미가 '국가'를 세웠다는 단군 신화가 더 유치한 신화라고 생각하는데? 난 '단군신화'가 역사라고 배웠거든.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B.C. 2333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연도를 제시하는 우리나라가 더 유치하다.

한국 고대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향가의 해독은 부끄럽게도 일본인 학자들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52쪽, 밑줄은 로보스)

서구 학문을 뒤늦게 받아들인 나라니 외국인들이 시작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서구 학문의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근대언어학'을 적용해서 고어를 해석하려고 했겠어? 아, 한 가지 더. 서구인들이 시작했어도 부끄러웠을까?

이외에도 편협한 이해가 드러나는 부분이 너무도 많지만, 일일이 다 언급하고 지나가기에는 내 시간과 이글루스 자원이 아까워서 이 정도로 줄인다. 난 잘난척 하는 인간들이 너무도 싫더라. 고종석 씨도 다시 보게 됐다. 열린 사고를 가진 지식인인줄 알았더니 이건 뭐...
by 로보스 | 2008/04/29 16:59 | |감상| | 트랙백 | 핑백(2)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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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감상문] 이성덕, 이야기 교회사, 살림. [감상문] 고종석, 발자국, 마음산책. [감상문]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새물결. 님 웨일즈, 김산, 아리랑, 동녘. 제프 일리, The Left 1848-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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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동안, 한 문단과 그 다음 문단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대신 어거지로 끼워맞춰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일전에 고종석 씨의 책을 비판할 때도 비슷한 이야기[2]를 했는데, 아는 걸 최대한 쏟아내려다 보니 비슷하지 않은 주제들을 무리해서 엮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일례를 들어, &lt;이보다 더 잔인할 수는 없다&gt;라 ... more

Commented by 제갈교 at 2008/04/29 20:05
홍콩에서 광동어가 쓰이는 건 홍콩을 둘러싼 지역이 광동성이라서 일텐데요...;;;
Commented by nippang at 2008/04/29 22:04
저는 주변에서 고종석씨에 대한 평이 무척 좋아서 기대했다가 올해 초에 <서얼단상>을 읽고 실망했어요. 다만 그 책이 좀 나온지 오래전 책이라 그런가싶어서 판단을 보류했지만 어떨지.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4/30 08:43
제갈교님// 그러니까 말이죠. 홍콩의 정치적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이야기를 '홍콩 반환' 글에 써놨으니 짜증난다는 것 아닙니까 T^T
nippang님// 저는 안 읽은 책이군요 ^^ 알라딘에 가서 서평을 좀 읽어봤는데, 그 책에 대해서도 상반되는 평이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한국의 촘스키'라며 찬양하는 소리부터 글이 지루하고 반복적이라는 지적까지 있네요. nippang님은 어느 부분에서 실망을 느끼신 건가요?
Commented by nippang at 2008/04/30 11:06
<서얼단상>이라는 강렬한 제목안에 묶여있기에는 너무 산만한 글모음이었어요. 부제로 강조하기도 한 '전라도'에 대한 이야기도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고종석씨의 글 좋아하는 분들은 일단 덮어놓고 훌륭하다고 하셔서 기대치가 높았던걸까 생각하지만. 음.
문장 훌륭하다고 극찬하시는 분들 많은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 와닿지가 않았어요. 소탈하고 겸손한 듯 보이는 문장뒤에 나르시시즘이 슬쩍 덮여있는것 같았어요.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어요. 이 책은 인용문의 비율이 높아서 딱히 '고종석의 책을 읽었다.'라는 생각이 들지않아요.
문학비평가 김현씨에 대한 글은 흥미있게 읽었지만 나머지는 흐릿흐릿.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4/30 11:40
nippang님// 아하 그렇군요. 왠지 제가 이 책에서 받은 느낌과 비슷하네요. 나르시시즘과 산만함. <감염된 언어>는 무척 흥미롭게 봤는데, 책마다 느낌이 다른 걸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변한 걸까요.
Commented by Asuka_불의넋 at 2008/04/30 21:31
인문학을 제가 불편해하는 이유가 저런 점이죠.
과학과 달리 지나치게 포장과 나르시시즘, 스노비즘이 지배하는 것 같더라구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5/01 13:27
Asuka님// 흠... 보기 나름입니다만, 그걸 '인문학'과 '과학'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일단 말씀하신 부분은 학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학자의 특성에 가깝다고 생각되고요. 전 과학자 중에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과학자들보다 인문학자들이 더 잘난 척 한다는 주장에 수긍하기 어렵군요 ^^

확실한 건, 고종석 씨처럼 '잘난 척 하는 인문학자'는 제가 봐도 불편합니다. :(
Commented by Wookie at 2008/05/01 18:25
확실히 편협하네요 ㅡㅡ;
보수는 생각이 재수없고 진보는 인간이 재수없다 라는 말이 여기서는 딱 맞는듯 ㅋㅋㅋ
너무 감정적이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은데, 요새 중국사태도 그렇고 금방 열받는것 같습니다 -ㅁ-;;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5/01 23:03
Wookie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너무 골라서 편집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 제가 원체 잘 모르면서 잘난척 하는 걸 싫어해서 T_T
Commented at 2008/05/04 00: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5/04 01:50
비밀글님// 아, 그렇죠. 하긴 고종석씨는 스스로를 '건전한 보수'라느니 '자유주의자'라느니 부르고 있네요. "진보는 인간이 재수없다"라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네요 ^^; 그냥... "고종석은 인간이 재수없다"로 수정하겠습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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