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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고 친애하는 H 선배가 유학가면서 헐값(?)에 책들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 때 눈에 와서 박힌 제목, <기호와 현대 예술>. 언어학 공부를 하면서 '기호학'에도 관심이 생겼고, '현대 예술'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가, '바로 그' 움베르트 에코의 책이라니! 하악하악거리면서 신청했다. 초조하게 며칠 기다리니 이 책이 집에 도착! ...했다만, 총 6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양과 내 수준에는 너무도 버거운 내용 전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게 1월 2일, 인도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으니까 자그마치 넉 달을 꼬박 다 채워서야 다 읽을 수 있었던 셈.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론 A분과 신호와 의미 B분과 시각 코드의 기호학을 위하여 C분과 기호와 기능 D분과 구조와 부재 결론 저자는 기호의 정의를 내리고 기호학의 한계를 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A분과에서는 신호, 혹은 '기호'의 전달 과정과 의미 해석 과정을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정보과학과 언어학이 많이 인용되는데, 다음과 같이 반가운 '수식'을 만날 수도 있다. (나는 이산구조 들을 때 나왔던 개념들이 나와서 더욱 반가웠다 ^^) 샤논은 h 기호 중에서 N의 선택을 가지는 메시지의 정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그리고 이는 하틀리Hartley 1928, 레이파포트Rapaport 1928의 정의와 유사하면서도 엔트로피를 연상시킨다). I = N log2h (68쪽) 이 부분은 KF 수형도, Q 모델 등 '기호적인' 표현도 많이 나오고,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문제들도 많이 다뤄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예컨대, 아무런 신호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고려해보자. 신호가 없는 상황에도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까? 저자의 대답은 "Yes."이다. 이를 '공신호(null signal)'라 부르며, 예를 들어 댐의 수위가 넘칠 때 경고 메시지가 뜬다면, 경고 메시지가 안 뜬 상황은 공신호가 계속 수신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이외에도 신호-잡음(signal-noise) 이야기 등 재밌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지만 여기서 대충 줄이자 T_T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 개신교회에서는 예배 중 '대표기도'라는 것을 많이 한다. 신도 중 한 명이 대표로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장경동 목사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니 대표자 좋을대로 기도하시오."라고 말씀하시는 반면 오정현 목사님은 "성도를 대표해서 기도하는 것이니 준비를 충분히 하고 기도하시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커뮤니케이션 모형으로 변환해보면 '기도'라는 신호에 대한 송수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발신자는 '대표자'이고, 수신자는 '신'과 '다른 신도들'이다. 난 '대표' '기도'의 특성상 수신자가 둘 중 하나에만 해당한다고 생각지 않고, 따라서 두 수신자를 다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목사님의 의견이 전혀 다르지만, 그저 장 목사님은 전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오 목사님은 후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닐까. 이후 주절주절 어려운 이야기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섞여서 나오는데, 솔직히 100% 이해한 것이 아니기에 정리하기가 힘들다. 그냥 대충 스토리만 따라가보면, '기호'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본 후, 기존의 기호학을 살펴본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이중 분절의 교리'가 등장한다. '이중 분절'이란, 언어는 1차적 분절 요소인 '형태소'와 2차적 분절 요소인 '음소'로 구분된다는 이론이로, 여기서 형태소는 '의미'를 구분시켜주고 음소는 '음'을 구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 교리를 모든 '코드'의 기준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기존의 도구로는 즉각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설명불가능한 현상>으로 간주하는 위험한 성향은 참으로 기이한 입장들을 낳게 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특히 언어에서처럼 이중 분절을 갖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들을 엄연한 <언어 체계>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있다. 즉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언어 코드에 비해 연약하다는 이유로 몇몇 코드들은 코드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중략) 물론 언어에는 연사구라는 결합 단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차 분절의 단위(형태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일차 분절의 단위들은 이차 분절의 단위(음소)로 분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에서의 의미 작용은 항상 이런 두 가지 요소들의 결합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의미 작용이 동일한 방식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언어도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273-274쪽, 밑줄은 로보스) 이러한 절로 시작하는 B분과 제2장은 6쪽에 불과한 짧은 장이지만, '이중 분절의 교리'를 파쇄하는 설득력 있는 근거들을 담고 있다. 이 장의 내용은 이후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저자는 코드의 '분절'이 꼭 두 단계로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데, 영화의 '삼중 분절'이나 광고의 '다중 분절'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C분과에서 저자는 '건축'을 심도있게 분석함으로써 '명확하지 않은' 코드들을 기호학의 품 안에 끌어안는다. 결국 저자가 공격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중 분절의 교리'? 아니다.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D분과의 제목은 '구조와 부재'고, 부제는 '기호학 연구의 인식론적 원리'다. 그래. 이제 저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구조주의를 비판한다.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기 나오는 내용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다; 아니, 되려 이해 못 한 부분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자주 인용되는 여러 학자들(데리다, 푸코, 레비스트로스 등)의 주장도 알아야 할테고, 철학적인 개념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하고, ... 근데 다 집어치우고, 구조주의에 대한 저자의 평만 들어보자. 결국 이 모든 것은 임시적인 (즉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구성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는 구조적 모델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모델들은 두 가지의 특징을 드러낸다. 첫째, 이런 모델들은 자체의 근원, 즉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둘째, 이런 모델들은 메타언어적으로 확립될 수도 없다. (중략) 결국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틀은 실제 경험의 다소 좁은 영역만을 형식화할 수 있는 경험론적인 도구이자 조작을 위한 도구이다. (516-517쪽) 구조주의는 대립과 관계, 즉 '구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사조이다. 하나하나의 구성원보다 그 구성원들이 이루고 있는 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 사조의 핵심 사상이다. 저자는 이 사조에 따른 여러 '구조 모델'들이 실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론적인 도구'이자 '조작을 위한 도구'라고 일침을 가한다. 레비스트로스 같은 사람은 그 '구조'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실재를 무시해버렸다는 것이 저자의 평이다.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과 공명을 일으켰다. 물론 나야 구조주의에 대해 깊이 모르니 꼭 구조주의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여러 모델들은 그 자체로 실재와 같은 것이 아니라 '경험론적인 도구'이자 '조작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많은 과학도들이 과학 모델들은 실재, 내지는 실재의 근사값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의 도구주의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그러고보니 에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나와 비슷한 관점을 취하는 것 같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 문장,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5일 성 헬레나 섬에서 죽었다>와 <율리시스는 모든 경쟁자들을 죽이고 자신의 왕국을 되찾았다>에서 전자가 <역사적으로> <진>이고 후자가 <거짓>이라는 사실은 기호학적으로 무의미하다. 요컨대 프레게가 말하듯이, Sinn의 관점에서는 이 두 문장이 같은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카르납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문장들의 내연적인 속성들은 외연적인 확인을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기호학적인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중시해야 한다. 첫째, 우리의 문화는 첫번째 문장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적 진실성>을 내포하는 코드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고대 그리스 사회는 두 번째 문장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적 진실성>을 내표하는 코드를 보유하게 되었다. 기호학적으로 말하자면 두 번째 문장이 <전설>을 내포한다는 점은 우리가 미래의 문명에서, 즉 새로운 자료의 발견으로 인해 나폴레옹이 다른 시기와 다른 장소에서 죽었다고(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믿게 되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86-87쪽) 여기서 저자는 나폴레옹은 역사적 인물이고 율리시즈는 신화적 인물이라는 '사실'은 (기호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는 사회에 의해서 구성된 '모델'이고, 그렇게 받아들일 때 여러 자료들과 충돌을 안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일 뿐이다. 과학이라고 여기서 그리 다르겠는가? 사실 에코는 이 책을 통해 '이중 분절의 교리'를 파쇄하고 현대 예술 속의 '자유로움'을 찬양하고자 했다. 코드를 설명하는 모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코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이라는 것이다. 불행히도 독자를 잘못 만나 저자의 결론은 무시한 채 이상한 결론을 만들고 말았다만,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달은 4개월이었다고 변명하고자 한다. 역시 에코님은 본좌였음을 다시금 뼈저리게 깨닫는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손에 잡았을 때는 지금보다 많은 양을 이해할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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