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밀양>, 열림원.

화제의 영화, <밀양>의 원작 소설. 이청준 선생이 실화를 바탕으로 1985년 쓴 소설이라 한다. 최규석 씨가 그린 큼직큼직한 삽화들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고작 99쪽 밖에 안되는 얇은 단편이다. 읽는데는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소설의 이야기는 계속 머리 속을 맴돈다.

/* 이하 스포일러 함유 */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소설의 내용만 간단히 요약한다. 어느 평온한 가정이 있었다. 부모와 외아들. 이 외아들이 어느날 하교길에 납치되고, 마침내 시신으로 발견된다. 살인범은 곧 붙잡히고, 모친은 그 살인범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차있다. 살인범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다 모친은 전도를 받게 되고, 마침내 개신교에 귀의해 평온한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감옥을 찾아간다. 그런데- 살인범은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는 게 아닌가! 그녀는 '주님'이 자신에게서 용서할 권한마저 다 앗아갔다면서 절규한다.

...이런 경우를 너무도 많이 본다. 뺑소니치고 도망쳐서 교회에 들어가 "하나님 사람을 쳤습니다 용서해주세요!" 5분 기도하고 용서받았다고 나오는 사람부터, 사원들 무진장 괴롭히고는 일요일마다 예배에 가서 혼자 평안을 얻는 사장까지. '죄인'을 용서하는 '주님'은 과연 정의로운 분인가? 아니, 주님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무심하고 그저 하나님께만 용서를 받으면 되는가?

마침 이번주 주일에 성경공부 같은 조 사람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등장한 말씀이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산상수훈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표준새번역, 마태복음 5장 23-24절)

무슨 뜻인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 이리도 명명백백히 적혀 있건만, 이 말씀을 제대로 아는 자는 몇이나 되며, 이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는 자는 몇이나 되는가? <밀양>의 사형수는 결국 성경대로 실천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그저 평안과 위로에만 매달릴 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런 자를 과연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을까- 혼자 느끼는 자기위안과 자기암시는 아니었을까, 두렵다.

내 눈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다른 이의 티끌을 판단하고 있으니 나도 참 한심하다. 나는 과연 저 말씀을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는가. 매주 교회에 가지만, 내 뒤에 남겨진 수많은 원한은 못 본 체 하니...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by 로보스 | 2008/04/23 13:51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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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oqueen at 2008/04/23 14:32
좋은 글이네..
난 매주 회개 기도 드리는 것도 못하고 -_-;;;
교회에 불만 이빠이인 날날이 신자로서 내가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으로서 받아야 할 징벌이나,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서, 오직 하나님께 용서해주세요.. 한 후에 아 나는 용서 받았다.. 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이 해주신 용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또다른 자기가 스스로 내린 용서 - 면죄부 일것이란 생각이 들어.

나도.. 이제 내 들보부터 좀 거둬내야 할텐데 -0-;;;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4/23 16:54
Hoqueen누나// 우와 오랜만에 등장하셨군요 +_+ 저도 그래서 사실 이 글 쓰면서 많이 부끄러웠어요 ( _ _)
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4/23 20:04
원제는 [벌레 이야기]이지요. 저는 그 제목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 왜 밀양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읽고나서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미웠던 건 아내를 전도시켰던 한 사모님이었더랬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 용서받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신도 용서하는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4/24 08:43
키오쿠님// 그러기에 불완전한 인간이겠지요... 답답합니다.
Commented by DK紅炎卿 at 2008/04/24 09:47
이청준씨라... 익숙한 이름인데 말이죠, 어디서 들었더라;;
저 사람의 "용서받았음"이 진짜일지는... 모르죠. 사실 용서는 용서 해주는 주체의 맘대로라서,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을지는.
성경에도 보면 "주여주여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그래서 넌 누군데?"라고 하는 경우가 생길거라고 하잖아요.
그러고 보면 스스로도 좀 무섭기도... ㄷㄷㄷ.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4/24 09:52
홍염// 이청준 선생이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 개신교계에서 유명한 책들을 좀 쓰셨지. 아마 여기서 들은 게 아닐까?

그리고- '용서받았음'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게 정답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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