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레이첼즈, <도덕 철학의 기초>, 나눔의집.

유명한 교양철학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근대철학의 주관심사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한다. 바로 존재론(ontology), 인식론(epistemology), 윤리학(ethics)이다. 신의 시대, 중세에서 인간 이성의 시대, 근대로 넘어오면서 '신'이 철학에서 쫓겨나고, 그러면서 신 없이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 철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뱀발: 그러고보니 이 3대 관심사는 칸트의 3대 <비판>인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실천이성비판>의 틀을 따른 듯 싶군. 아하!)

이 책은 그 중에서도 특히 '윤리학'에 대해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난 도덕 철학 moral philosophy과 윤리학 ethics의 차이가 뭔가 했는데 별 차이가 없다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쉬운 설명과 친숙한 예화를 통해 윤리학에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윤리학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역자들의 친절하고도 풍부한 해설로 이해도 더블카운트! 윤리학이 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과서(철학과 교과서로 쓰이더라 -_-;;)를 이렇게 즐겁게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흑흑 T_T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짧은 1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 "'도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전체 이야기의 근원이자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도덕적 문제'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어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아참, 1부 바로 앞에 붙어있는 '책 전체의 해설'도 굉장히 훌륭하다. 이 해설은 역자들이 첨가한 부분인데,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헤매지 않도록 전체적인 구도를 설명한다. 여기서 소개된 것이 윤리학의 세부 분야인 기술윤리학, 메타윤리학, 규범윤리학이다. (오 이런 전문용어 쓰니까 엄청 유식해 보인다 ㅋㅋ) 이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책에서 이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이 해설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메타윤리학'으로 넘어간다. 메타(meta)라는 그리스어는 보통 "~ 다음에"라는 의미로 번역되는데, 화학에서는 방향족 화합물에서 1, 3번 탄소에 작용기가 붙어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가 아니고;;; 죄송합니다 (_ _);; '메타'가 학문 이름과 함께 쓰이면 그 학문 자체를 연구하는 한 단계 위의(?) 학문을 의미하곤 한다. 예컨대 메타과학(metascience)이라 하면 과학이 과학답게 되는 이유(과학철학)라든지 과학의 변천 과정(과학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메타윤리학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특별히 윤리학을 '정당화'해주는 근거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문화, 개인의 주관, 종교 등이 윤리학의 근거로 다뤄지고, 이어 저자에 의해 반박당한다. 아, 여기서 잠시 윤리적 자연주의 -- 인간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주장 -- 도 등장했다 관광당한다 -_-;; 개인적으로 이 녀석에 대해 관심이 좀 있었는데 나름 호기심은 해결한 듯? 저자는 이러한 반박들을 통해 결국 '이성'을 윤리학의 최고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저자가 종교에 대해 지적한 가장 큰 반박이 "신이 명령했기 때문에 윤리가 선한가, 윤리가 선하기 때문에 신이 그걸 명령했는가?"라는 문젠데, 저자는 어느 쪽을 택하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신'에서 윤리의 근거를 찾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난 저자의 논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신이 명령했기 때문에 윤리가 선하다면 신이 인간들에게 '옳지 않은' 명령을 내려도 윤리가 되어버리므로 모순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건 신을 세상과 유리되어있는 별도의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신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만 하는 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이미지 하에서는 당연히 '선함'과 '신'은 별도의 존재이고 저자의 논박도 유효해진다. 하지만 신이 말그대로 '전지전능'하여 '옳음'과 '그름'을 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신이 내린 명령을 '옳게' 만드는 것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때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시비를 가릴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차라리 종교가 윤리학의 근거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 종교를 갖지 않는 자에게 그 '신'의 명령은 무의미하다"라는 반박이 더 의미있어 보인다.

다음으로 책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규범윤리학'이 등장한다. 규범윤리학은 크게 이기주의와 의무주의로 나뉘는데, 이기주의는 결국 나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윤리를 지킨다는 주장이고, 의무주의는 그래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윤리를 지킨다는 주장이다. 이기주의 진영에서는 심리적 이기주의, 윤리적 이기주의, 그리고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공리주의'가 다뤄지고, 의무주의 진영에서는 칸트 이론과 사회계약이론이 다뤄진다. 이 책에서는 이들 모두를 비교적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공평하게 설명한달까. 규범윤리학에서도 할 말이 많지만 일단 넘어가자. 아, 사회계약이론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제시하면서 결국 인간은 내시 평형(Nash equilibrium)에서 놀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는 주장을 하는데, 이건 게임이 한 판으로 끝날 때의 이야기잖아. 여러 종류의 AI에게 이런 게임을 반복해서 하게 하면 결국 '인과응보형' AI가 승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타적 유전자> 등 참조) 이것만으로도 저자의 반박을 하나 튕겨낼 수 있는 듯. :P

책의 마지막에서는 여성주의 윤리학과 덕(virtue)의 윤리학이 소개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적' 윤리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획기적인 발언이 등장한다. (어라. 그러고보면 결국 메타윤리학 단원에서 자기가 제시한 주장을 뒤집은 셈인가?) 저자는 윤리라는 것이 꼭 이성에서 유도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덕'을 원천으로 삼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친구에게 신뢰를 지켜야 하는 것은 '우정'이라는 덕으로부터 유도되는 윤리인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개별 인간'과 '보편 인류' 사이의 '가족', '친구', '이웃' 등에 대한 윤리가 다뤄지기 때문에 강력한 반면, 덕과 덕 사이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저자는 이러한 여러 관점을 통합해 마지막 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다. 난 저자의 주장에 그다지 깊은 감명을 받지 않았는지 -_-; 별로 기억에 남지를 않네.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 책을 읽을 즈음, EBS에서 방송한 '아이의 사생활' 5부작 다큐멘터리를 접했는데 거기 '도덕성'에 대한 방송분이 있어서 매우 흥미롭게 시청했다. 프로그램과 이 책이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내용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도덕'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인류의 도덕, 아직도 많은 부분이 신비의 영역인 것 같다. 이 책도, 이 프로그램도 좋으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많이많이 보시길 권해드린다.
by 로보스 | 2008/04/10 16:50 | |감상| | 트랙백 | 핑백(2)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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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의 정신 아리스토텔레스, 한길사. [감상문] 프랭크 딜리, 서양철학사, 현대지성사. 토마스 아퀴나스, 지성단일성, 분도출판사. 제임스 레이첼즈, 도덕 철학의 기초, 나눔의집. [감상문]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로이 헤리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보고사. [감상문] 데이비드 에드먼즈, 비트겐슈타인은 왜?, 웅진지식하우스. [감상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한나 아렌.. at 2008/10/01 14:53

... 화라면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류에 해악을 끼치는 국가 집단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비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의 기준이 인간의 보편적인 합리성이라면[1],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을 정립할 수 있을테고 그로부터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루살렘 법정은 어떤 쪽을 택했을까? 이 문제는 에필로그와 ... more

Commented by nippang at 2008/04/21 22:55
로보스님이 감상을 올려주시는 책들은 꼭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빈도가 굉장히 높아요. 책은 아직이지만 다큐멘터리를 찾아서 조금전에 3부까지 봤어요. 저에게는 무척 생각할거리와 도움을 주는 좋은 프로그램이에요. 전에 같은 방송사의 아기성장보고서도 즐겁게 봤는데,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뭘 찾아봐야할지 감잡기가 어려운데 덕분에 오랜만에 잘만든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되어서 룰루랄라~. ^^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4/22 08:34
nippang님// 와- 찾아서 보셨군요 ^^ 저 프로그램 참 좋아요. 저도 요새 계속 EBS 급호감 모드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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