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인.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미리내님의 블로그였고, 어렸을 적 역사를 꽤 좋아했고 요즘도 (아는 건 없지만) 관심을 갖고 있는지라 사삭 질러버렸다 -_-v 미리내님 감사해요 :$

재일교포 n세(0 < n < 4, n ∈ ℕ) 역사가가 쓴 이 책은,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관점'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읽으면서 내가 고대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들이 무참히 깨지는 것을 느꼈다. 질문을 몇 가지 던져보겠다.

1) 광개토대왕릉비는 처음 발견한 일본인 장교에 의해 조작되었다. (O, X)
2) 고대 가야 지역은 왜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O, X)
3) 발해는 고구려인들에 의해 지배된 국가이므로 신라를 동포로 여겼다. 이 시대를 '남북국 시대'라 불러야 한다. (O, X)
4) 기자조선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는데도 중국 사서에 의해 위조된 대표적인 예다. (O, X)


보통 한-중-일 삼국간의 사관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들을 뽑아 보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정답'이 O, X, O, O라고 배워왔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을 해본적이 있는가?

역사란 객관적 실체라기보다는 '남아있는 과거의 파편들을 모아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 관점에서 현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사관을 비판한다. 역사를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정치적 지형을 개입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앞의 2번 주장과 같은 주장을 들으면 우리는 분개한다. 왜? "감히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다는 소리를 지껄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자. 가야와 우리의 공통점은 '우연히'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것 밖에 없다. 당시 왜인들이 현재의 일본국인 것도 아니고 당시 가야인들이 현재의 대한민국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걸까?

이게 바로 근대 이후 등장한 민족주의의 함정이다. 유구한 역사의 단일 민족, 자랑스러운 한민족! 사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단일 민족이 아님이 너무도 자명한데도 우리는 끝없이 세뇌되어왔다. 게다가 평화를 사랑하여 타국을 침략한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 땅을 끝내 지켜낸 위대한 민족이라 꿋꿋이 믿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광개토대왕릉비의 기사는 '조작된 게 틀림없고', 고대 가야 지역은 '우리 민족의 땅이어야 마땅하고', 발해와 신라는 '같은 민족이 아닐 리 없고', 기자 같은 외인이 이 땅을 '지배했을 수는 없다'. 결국 카이사르가 이미 2천년 전에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만 믿을" 뿐이다.

이 책에서는 조금 더 정치적인 의도를 파헤치는데, 중국이 '동북 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는 것은 현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시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북한-한국 학계에서 신라-발해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려는 것은 '남북 분단'이라는 현재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고, 일본에서 한반도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데서 시작했다는 것 등이다. 다양한 근거와 흥미로운 사료들이 많이 나오니 역사에 관심 많은 분들은 찾아보시길.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연 당시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에 접근한다. 누구나 주관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정치성을 배제하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역사 연구는 이렇게 해야하는구나' 싶더라. 그러면서도, 민족을 그리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 동아시아에서 저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 '조선인' 성씨를 갖고 일본 땅에서 일본사 연구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일본의 극우 폭력주의자들에게 행패는 당하지 않을지. 용기 있는 분이라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이야기.

앞에서 제시한 네 개의 질문 중,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1번에서 3번까지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이 책의 관점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서술해보련다. 물론 나는 사학을 전공하지도, 관련 과목을 수강하지도 않았으므로 순수하게 '가설'적인 이야기임을 전제한다.

우선 나의 사관에 대해 살짝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예전에 관련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았네. 그 일부를 복사해온다.

중국 하(夏) 왕조의 실존 여부를 놓고 수많은 사가들이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하 왕조는 실존하지 않았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하 왕조의 수도로 추정되는 하남성 부근에서 다량의 유물과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하 왕조가 실존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사실, 다량의 유물과 유적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 하나가 하 왕조의 실존성을 입증해주지는 못한다. 막말로, 거기 있었던 나라의 국명이 '로보스킹왕짱제국'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하에서 가장 설명이 잘 맞는 가설이 '하 왕조 가설'이기 때문에 그 가설을 택하는 것이다. '하 왕조 가설'을 택하면 (다른 가설에 비해) 공자의 '사기'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부분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역사'는 남아있는 과거의 파편들을 가장 정합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 당연히 수정되어야지. 그리고 '가설'이기 때문에 증거가 많지 않은 시대에 대해서는 동시에 여러 개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사가 대표적인 예겠군.)

'단군조선'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단군'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1500년 넘게 살다가 신선이 된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그렇다면 '단군 왕검'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신화와 여러 위인들의 이야기가 섞여서 만들어진 '신화적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군조선'이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왜? '한반도 북부에서 요하 근처에 걸쳐 살던 석기 시대 인간들이 형성한 고대 국가'를 표현할 수 있는 정합적인 용어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앞의 예와 마찬가지로 그 인간들이 '쀍쀍뀗쐃'이라는 국가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사서들을 정합적으로 설명하려면 '단군조선'이라는 용어가 좀 더 적당하므로 이 용어를 쓰는 것 뿐이다.

자, 그렇다면 '기자'는 어떨까? '기자'를 배격하는 이유로 드는 것이 실존했을 리 없는 '신화적 인물'이라는 것인데, 그럼 단군은 -_-? 기자 역시 단군처럼 신화와 여러 위인들의 이야기가 섞여서 만들어진 '신화적 존재'라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걸까.

일반적인 인류사는 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내려왔다고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가르는 가장 큰 분수령이 바로 '철기 사용'이다. 연나라에서 철기를 사용하는 일단의 무리가 몰려와 청동기 '조선'을 정복했다- 는 것이지. 위만조선을 '철기 조선'에 비정한다면 단군조선은 '석기-청동기 조선'에 해당할 것이다. 자, 여기서 의문이 든다. 단군조선의 '석기-청동기 패러다임 전환'은 어떻게 일어난 걸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자체적으로 발명했거나, 외부에서 받아들였다는 거. 역사에 무지한 관계로 잘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니 '청동기의 전래' 어쩌고 항목이 있던 걸로 봐서는 후자가 맞는 것 같다. 그럼, 외부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는 인류 집단이 조선 쪽으로 왔다는 이야긴데, 이 집단을 '기자 집단'이라 부르면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청동기 집단이 석기 집단을 정복한 것을 '기자 집단'이 '단군 조선'을 정복해 '기자 조선'을 세웠다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학교 국사에서는 '자주적이고 순수한' 우리나라 역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누군가 내려와 '우리나라'를 정복한다는 내용을 삽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동기고 철기고 전부 중국 쪽에서 전래됐을텐데, 정치적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거지. 그런 관계로 위만 역시 '연나라 사람이지만 그 근본은 조선인' 뭐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고. 한사군의 지배는 최대한 강역을 작게 가져가고, 그것조차 금방 끝났다고 떠들어대지. '국가와 민족에 충성을 다하는 아이들'을 만들기에는 좋겠지만, 역사의 '학문적' 목적에서는 한참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아 너무 긴 글 썼더니 머리가 터질 지경. 난 역시 역사에 무식하다는 걸 절실히 느낌 ;ㅂ;
by 로보스 | 2008/03/28 17:17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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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3/28 17:53
오 안그래도 이런 생각 많이 하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_+ 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어떠한 사람들이 살다 죽고 무엇을 남겼느냐에 관심이 많고, 지금의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사실 중국도 우리도 일본도 (그리고 대만도!) 많은 역사를 "함께"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왜 국가와 민족이 끼어들어야하는지 참 가슴이 아픕니다 ㅠㅠ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3/28 18:09
키오쿠님// 그렇죠 그렇죠 T^T 역시 정치가 개입되면 곡학되기 십상인 것 같아요.
Commented by 제갈교 at 2008/03/28 19:55
일전에 어느 분의 글을 보니까 "한반도 신라 남쪽에 일본의 왜와 다른 왜인들이 살았다."(기억력 부족이라 맞는지 모르지만)는 주장도 있더군요. (초기 신라가 너무 왜와 싸운 일이 많은데, 당시 조선造船 기술로는 바다 건너기가 힘들고..)

요즘은 "단일민족은 허상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Asuka_불의넋 at 2008/03/28 22:33
광개토대왕릉비 조작...이나 발해가 신라를 동포로 여겼다는 것 같은 얘기들은 사실 국사책의 확대해석이 개입된 좋은 예지요. '국사 교육' 자체가 뭔가 세뇌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생물학과 더불어 역사학 같은 현상적 학문들에 매료된 저로서는 참 슬픕니다.
Commented at 2008/03/30 23:3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3/31 09:13
제갈교님// 그것 참 흥미로운 주장이군요 :) 역사에 무지한지라 얼마나 합리적인 주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단일민족은 허상이다."라는 주제는 제가 언젠가(!) 쓸 책의 주제이기도 하지요. 이런 허상을 주입받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T_T
Asuka님// 뭐- 대부분의 교과서가 시장으로 풀린 마당에 아직도 국가에서 국사 교과서만은 바득바득 붙들고 안 놓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특정 가치관 주입에 이용해먹기 딱 좋으니까요. 그렇다고 새역모 같은 단체가 판을 치도록 완전 시장에 맡길수도 없고... 국사 교육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비밀글님// 님도 좀 짱인듯 -_-)b
Commented by 페스츄리 at 2008/10/03 21:48
오호..김선자교수님의 "만들어진 신화 황제신화"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아주 좋을 책이로군요. 정말 정말 동감합니다. 저의 생각과 거의 같아서요!!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에는 정말 동감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기자조선이 우리민족의 문화창조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확신을 하고 있거든요. 이성시교수님의 이 "만들어진 고대"는 아주 저에게는 강력한 이론적인 무기가 될 수 있겠어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10/06 08:45
페스츄리님// 감사합니다. (_ _); 아, 그런데 기자조선에 대한 얘기는 저 책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제 생각일 뿐입니다. 혹 오해하실까봐...
Commented by 페스츄리 at 2009/04/18 14:51
아..이 책을 산다산다하면서도 못샀네요. 기억에서 한참 멀어져 있던 책인지라..이제 새삼스럽게 이 글을 보니 구입의욕이 샘솟는군요..항상 좋은 글들 멀리서 잘 보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18 22:59
페스츄리님// 좋은 책이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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