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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전(前) 총장이었던 로버트 러플린 씨의 저서. 아무래도 총장으로서는 그리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이 책 역시 첫 이미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흥.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좋은 책들 써내니까 그게 그렇게 부럽냐?' 뭐 이런 생각? 그러다 작년에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후 50년>에 나온 카우프만(S. Kauffman) 씨의 글을 통해 창발성 이론을 접하게 되었고, 창발성 이론이 생각보다 그럴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그러고보면 물리유기 시간에 최인성 교수님께서 DNA의 수소를 전부 플루오린으로 치환해도 DNA는 여전히 견고하다는 말씀을 해주시면서 개별 원자의 수소 결합보다 전체 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네. 이미 그 때 창발성 이론을 접한 셈이다. 어쨌든 이렇게 창발성 이론들을 접하다보니 러플린 씨의 책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고, 마침내 읽게 되었다. 창발성 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과학자들로는 프리고진과 위에서 소개한 카우프만 등이 있다. 이들은 화학적인 관점에서 '창발성'을 이해한다. 미시적인 분자들이 뭉치고 뭉치고 뭉치다보면 어느 임계점부터는 그들의 구조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플린 씨는 약간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주장은 내가 처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책을 비롯해서 최근에 발간된 생물학에서의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self-organized criticality)에 대한 많은 책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내 주장은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실험적인 혼란 자체를 중요한 요인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과, 적어도 오늘날의 실험 전략에서는 유전자 통제를 완전히 연역적인 미시적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보는 점에서 그렇다. (220쪽) 무슨 말인고 하니, 러플린 씨는 거시계의 측정 자체가 엄청난 양의 불확정성(uncertainty)을 포함하기 때문에 실험 자체가 '창발성'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거 좀 어려운데; 나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이해한 바로는 통계역학의 예와 연관지어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분자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상(phase)'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떼를 이루게 되면 그 때부터 '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이들의 불확정성이 전부 평균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창발성의 한 예인 셈이다. 러플린은 자신이 이론화한 '분수 양자 홀 효과(fractional quantum Hall effect)' 역시 창발성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독립 입자로 존재하지 않는 분수 전하(e/3, e/5 등)가 여러 입자들이 모여 계를 형성하니 떡하니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체물리학의 포논(phonon)이나 플라즈몬(plasmon) 등도 '계'일 때만 나타나는 '입자'들이다. 러플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우주도 한 두 입자가 아니라 입자계로 설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던진다. 심지어 포논과 광자의 관측된 운동이 무척 흡사하다는 것을 근거로, 광자 역시 포논처럼 '매질'을 갖고 있으리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 바로 에테르(ether: 19세기 말에 '빛 파동'이 이동하도록 해주는 매질이라고 생각된 가상의 물질)의 부활이다. 러플린은 일부러 '에테르'라는 용어를 쓰면서 진공 역시 하나의 '매질 입자계'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다뤄야 옳다고 주장한다. 러플린은 특히 실험을 강조했는데, 환원주의적 이론이 가득한 현 물리학계에 불만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과학은 '실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창발성 이론이야말로 '실험'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이론이라고 말한다. 이론물리학자인 러플린이 이렇게 말하다니 뭔가 아이러니컬하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보편적인 물리법칙은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일이다. 그런 가르침은 여러 의미에서 잘못되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결과들은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심각하다. 자기만족의 사고방식은 아름답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사고방식과는 정반대가 된다. 사실 일반적으로 정말 중요한 결과들은 그런 사고방식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물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어서, 과학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던 17세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의 사상가들도 그런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편적인 물리법칙을 믿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도로 정확한 실험 덕분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55-56쪽) 책 곳곳에 등장하는 개그와 다양한 비유들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책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러플린이 이 책을 쓰면서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책의 구성과, 역시나 번역. 물론 이공계에 몸 담은 분이 한 번역 치고는 굉장히 훌륭한 번역을 보여주시지만, 이 책에서도 역시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많이 있다. 위에 인용한 부분만 해도 좀 어색하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가독성이 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또한 책의 구성이 정확히 어떤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한 번에 와닿지 않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물리학을 그리 깊게 공부해보질 못해서, 내가 이해한 바가 저자의 의도에 합치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물리학을 바라보는 한 가지 새로운 관점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 관점이 러플린의 관점이건 내가 새로 만들어낸 관점이건 간에 말이다. 물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뭐 애초에 헛소리로 규정짓고 책을 보면 별 수 없지만, 나름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은 이론물리학자의 말인데 완전 헛소리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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