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웰스, <최초의 남자>, 사이언스북스.

우왕ㅋ굳ㅋ 정말 훌륭한 책이다! 읽어본 분들이 다들 훌륭하다고 하시길래 대뜸 질렀는데 역시나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생물학에 관심이 있거나 역사학에 관심이 있거나 인류학에 관심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여기에 좀 더 더하자면 고고학, 언어학 정도까지도?)

이 책은 인류가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어떻게 이동했는지 유전자 연구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유전자? 유전자를 통해 어떻게 인류의 시원을 찾는단 말인가? 우선 유전자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유전자는 말 그대로 대대로 유전되는 인자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듯이 세포 내에는 한 쌍의 염색체(상동염색체)가 있는데, 이 염색체 위에 여러 개의 유전자가 주르륵 존재한다. (조금 전문적으로 얘기하자면 DNA 상의 '특정 염기 서열'을 유전자라고 부를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전자의 변이가 축적되기 때문에 변이가 많이 일어난 유전자일수록 오래된 유전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기본적인 연구 방향이다.

문제는, 이 한 쌍의 염색체가 자손에게 전달될 때 다양성을 위해 서로 마구 섞이게 되고(교차 현상), 이것 때문에 실제로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유전자가 섞여서 변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교차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즉 계속 그 형태 그대로 유전되는 녀석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Y 염색체와 미토콘드리아 DNA(mtDNA)를 얻었다. Y 염색체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교차 현상 없이 그대로 유전되는 녀석이고, mtDNA는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에 들어있는 유전자로 자식들은 무조건 어머니의 mtDNA를 갖게 되어있다. (수정란 속의 소기관은 전부 어머니 것이니까!)

이 책은 이 Y 염색체와 mtDNA의 변이를 조사해 인류의 기원을 찾아나선다. 결론은? 아프리카 동부. 아프리카 동부에서 잘 정착해서 살던 인류는 환경이 점점 척박해지면서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 아시아, 유럽으로 진출한다. (일일이 경로를 기술하지는 않겠다. 관심있는 분은 여기를 참조하시길.) 이 과정에서 인간은 '지능'이라는 무기를 바탕으로 다른 동물들이 다 죽어가는 환경에도 놀랍게 적응한다. 이 지능과 더불어 인간의 언어 능력도 놀랍도록 향상되었고, 마침내 '역사'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사실 내용이야 뻔한 거고, 대부분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입증했느냐이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역사적 지식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가 또 하나 재미있는 포인트이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유독 내 눈을 끌었던 것은 바로 '언어학적 증거'. 어렸을 적 한 때 언어학도를 꿈꿨을 정도로 =_= 언어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였기에, 유전자를 통한 연구와 비교언어학적 연구가 정합적인 결과를 보였다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는 내가 크게 감동받았던 책인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도 인용된다 아흑 T_T)

뭐랄까, 너무 맛있어서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는 음식 같달까. 꼭꼭 씹어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책이 있는 반면, 이 책은 읽을수록 재미나서 무진장 빨리 읽은 것 같다. 관심 있는 분들께 꼭 권하고 싶은 책. :)

@ 위에서 언급한 초록불님 글에도 나오는 이 지도와 함께 보면 재미가 배가될 듯.
by 로보스 | 2008/02/22 20:28 | |감상| | 트랙백(1) | 핑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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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gem486h NOT .. at 2008/02/23 17:50

제목 : (독서) 스펜서 웰스 / 최초의 남자
제목만 봐선 소설책인데... @.@'최초의 남자(The journey of Man)'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로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왜 제목이 Journey of Man인지 (그거랑 '최초의 남자'랑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책이죠. 전 이번에 lovos님의 리뷰를 보고 접했지만 왠지 유명한 책일 거라 생각되는... 훌륭한 책입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에 관심이 있거나 고고학이나 언어학에 관심이 있......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독서 리스트. at 2008/02/22 20:29

... 다, 동아시아. [감상문] 이언 바버,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김영사. 도모나가 신이치로, 물리학이란 무엇인가, 사이언스북스. [감상문] 스펜서 웰스, 최초의 남자, 사이언스북스. [감상문] 로버트 러플린, 새로운 우주, 까치글방. 스튜어트 카우프만, 혼돈의 가장자리, 사이언스북스.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 세종서적. 전창림, 미술관에 간 화학자, 랜덤하 ... more

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2/22 20:41
아, 서점에서 보고 엄청 유혹에 시달렸던 책이네요. 이거 한 번만 찍히면 넘어가겠는데요? ㅋㅋ 역사학과 언어학, 고고학 좋아하는 저에게는 환상이군요 T_T 세계지도 하나 큼직하게 붙여놓고 그림 그려가면서 보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요.
Commented by nippang at 2008/02/22 20:54
우와 책추천! 두근두근!!!
몇 년 전에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과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으면서 너무 즐거워서 깔깔거리며 읽었더니 동생이 궁금해하며 무슨 책인지 훑어보고는 '너는 미쳤어.' 하던 기억이 나요. 왠지 또 너무 즐거워하며 읽을 듯한 책!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2/23 08:58
키오쿠님// 지르세요 지르세요 +_+ 완전 재밌다니까요!
nippang님// 호오 'ㅂ' 과학 책을 좋아하시는군요! 바람직하네요 ㅋㅋㅋ 이 책도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이 어떠실지? ^^
Commented by 와이에이치 at 2008/02/23 11:57
이게 K대 도서관에 있어서 잽싸게 납치해왔습니다~
읽어보는 중인데 재밌는 구절이 많네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2/23 12:00
조교님// 요새 책 너무 열파하시는 거 아닙니까 ;ㅁ; 조교님 블로그 따라가기가 벅찹니다요 ㅋㅋㅋ
Commented by nippang at 2008/02/24 22:07
전혀 생경한 분야였는데 임신중에 닥치는 대로 읽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강의 책을 보면서 쉬운 책들을 찾아보게 되었어요.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 책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른다는건 '셰익스피어'를 모른다는 것과 같은데 그게 잘못되어있다고 느끼지않는다!" (정확하지는 않고 이런 느낌으로~)라고 과학에 무지한 것에 위기감을 느끼지않는 지의 현상황에 대해 설득력있게 이야기하는데. 파워풀!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2/25 08:35
nippang님// 아하 :D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계시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학에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T_T 그러니 음이온이니 원적외선이니 하는 거에 다 낚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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