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부키.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1월에 읽은 책으로, 인도 갔다온 직후부터 읽기 시작해 며칠 안 걸려 다 읽었다. 그만큼 재미있고 쉽게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제목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살짝 비틀어 만든 말로, 겉보기에는 친절하게 남을 도와주지만 그 도움의 방향이 자신의 이익을 향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철학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규정한다.

신자유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며 자유 무역을 강조하는 경제학 사조이다. 우리는 대개 보수적인 경제학 교과서로부터 신자유주의의 위대함을 배우곤 한다. 내가 열심히(!) 공부했던 <맨큐의 경제학>에서도 신자유주의는 바람직한 관점으로 등장했다. 경제학의 역사를 다루는 보수 진영의 책들도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우월함을 역설하곤 한다. 허나 슬프게 미안하게도 이 모든 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되고 재해석된 역사일 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며 실제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발전이 자유무역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들의 발전은 자유무역보다는 더없이 심한 보호무역에 의한 것이었고, 그들이 발전을 다 이룩한 이후에야 자유무역 체제가 도입되었다. 지금 선진국들이 자유무역 체제를 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발전하는 데' 유리하다기보다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감춘 채 후진국에게도 자유무역체제를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것이 발전의 동력이요 최고의 정책인양 포장해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여.

이 책에서 저자는 굉장히 인상적인 예를 들어 자유무역이 후진국에게 얼마나 불리한지를 설명한다. 어느 아버지에게 네 살 먹은 아들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아들을 노동시장에 내다판다. 이제 기초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자신의 식비는 스스로 감당하라는 뜻이다.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배우는 것이 학교 따위 허접한 공간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믿는다. 자, 만약 이런 아버지가 주위에 있다면 어떨까? 무지막지하게 욕을 해대며 그 아들을 아버지로부터 격리시켜 보호/교육하지 않을까? 설령 그 아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육체노동이 전부일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압력을 많이 준다 해도 그 (충분한 기간 동안 '보호'받으면서 '교육'받지 못한) 아들이 핵물리학을 연구한다든지 뇌수술을 집도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은, 후진국에게 자유무역이라는 게 바로 이런 의미라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차 산업들만 가지고 겨우겨우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나마도 선진국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고.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스친 것은 '한미 FTA'였다. TV에서, 지하철에서, 신문에서 FTA 광고만 보면, FTA가 최고의 만병통치약인 것 같다. FTA가 체결되는 순간 전 국민이 다 잘 살게 되고 천국이 도래할 것만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가 '자명한' 후진국은 아니기 때문에 FTA를 체결해서 피를 다 빨리고 사망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것이 득이 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와 자유무역을 했을 때 과연 우리의 기술력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로 신자유주의가 후진국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선한 의도의' 나쁜 사마리아인이다. 워낙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세계를 덮고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설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패악을 알게 되면, 언젠가 저 사람들이 나쁜 사마리아인 코스프레를 벗어던지게 될 것이고, 끝내 신자유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다.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하기 위해 이렇게 짤막한 서평을 올린다. :)
by 로보스 | 2008/02/19 16:07 | |감상| | 트랙백(1) | 핑백(3)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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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코스모폴리탄 at 2008/02/26 01:50

제목 :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필연성
시장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는 응집물리에서의 상전이와 같은 과정이 수반된다. 상전이란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표준적인 물이 1기압하 섭씨 100도에서 갑자기 기화되거나 섭씨 0도에서 얼음으로 변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체계의 전이 메커니즘을 뜻한다. (여기서 상전이의 구체적 메커니즘을 설명하긴 매우 어렵다....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독서 리스트. at 2008/02/19 16:10

... 어스틴, 이미지와 환상, 사계절출판사. [감상문] 앤드루 세이어, 사회 과학 방법론, 한울. 김비환, 맘몬의 지배, 성균관대학교출판부. [감상문]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부키. [감상문]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EBS 지식채널ⓔ, 지식 e - 시즌 2, 북하우스. 비평 김진호 외,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평사리.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한홍구, .. at 2008/11/25 16:51

... 제된 형태로, 조금 더 근거를 갖추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기대했던 내가 바보 같은 거였을까? 물론 중간중간 흥미로운 시각들도 있었지만, &lt;나쁜 사마리아인들&gt;이나 &lt;88만원 세대&gt; 수준으로 새로운 관점은 없었다. 솔직히 이 점은 살짝 실망이었다. 뭐 책에 대한 기대야 사람마다 다 다른 법이니, 내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존 케네스.. at 2009/03/31 18:44

... 학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나인데도 말이다. 사실 이 책을 한경에서 출판했다는 걸 알고 '아 또 시장경제 찬가인가...' 하면서 저으기 실망했는데 완전 반전! &lt;나쁜 사마리아인들&gt;을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을 또 한 번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느 저자에게 실례인 걸까 ^^;) 내가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more

Commented by 미리내 at 2008/03/06 00:38
오늘 전공서적 사러 갔다가 이 책 들고 나왔지 뭡니까...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3/06 08:58
미리내님// 어이쿠 잘하셨네요 +_+ 재미있어요-
Commented by 미리내 at 2008/06/23 03:19
어휴 이제야 다 읽었네요 -_-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6/23 08:09
미리내님// ㅎㅎ 서평 올리신 것 잘 읽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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