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J. 부어스틴, <이미지와 환상>, 사계절출판사.

오랜만의 독후감. 12월에 다 읽은 녀석인데 한 달을 훌쩍 넘겨 이제서야 독후감을 쓰게 되네. 이제 책 내용조차 가물가물해지는데, 일단 어떻게든 흔적을 남겨보려 키보드를 잡았다. 시작해볼까.

이 책은 친애하는 친구가 통찰력이 뛰어난 책이라며 권한 책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국문판 제목은 <이미지와 환상>, 영문판 제목은 Image로, 제목에서부터 이미 모든 것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마치 보드리야르의 주석서 같은 느낌.

일전에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논거들에 대한 반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사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진단' 그 자체에는 그다지 불만이 없다. 실제로 우리 세상은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더 이상 알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더 나아가 허구가 허구를 양산하고 다시 또다른 허구를 만드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책에서 수많은 예를 제시하고, 그것도 치밀한 추적을 통해 깊이 숨어있는 허구들을 밝혀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저자에게 100% 동의할 수 없다. 첫번째로 동의할 수 없는 점은 과거와 현재의 '대조적 구분'이다. 저자는 "과거는 XX했는데 현재는 XX하지 않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민중(folk)'은 사라지고 '대중(mass)'은 늘고 있다. 민중은 글도 모르고 자의식도 약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기 나름대로 창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독특하고 창조적인 민중들의 생산품을 언어, 제스처, 노래, 민속, 민속춤, 민요라고 부른다. 민중은 이런 것들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들의 생산품은 아직도 학자, 애국자, 골동품 수집가들에 의해서 모아지고 있다. 민속품은 곧 사람의 목소리다.

그러나 대중(mass) 미디어, 대량(mass) 생산 등에 쓰이는 매스(mass)란 말은 수단인 화살이 아니고 목표인 타깃이다. 대중은 목소리가 아니고 그것을 듣는 귀이다. 대중은 인쇄물, 사진, 영상, 음향이 만드는 사람들이 팔려고 다가가는 대상이다. 민중은 영웅을 창조하지만, 대중은 영웅을 단지 듣고 보기만 한다. 대중은 누군가가 보여주고 들려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90쪽)

역사에 양자 점프(quantum jump; 단절적 점프)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주장에 그리 동의할 수 없다. 위에서 인용한 글을 보자. 과연 우리가 민중과 대중을 무 자르듯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백 번 양보해 저자의 정의를 받아들인다해도, 민중의 표현은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다. 민중은 영웅을 창조할 뿐 아니라 그것을 듣고 보기까지 한다. 아니 내 생각에는 듣고 보기 위해 영웅을 창조한다는 쪽이 더 가깝다. 그렇다면 현대 대중의 모습이 이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형식상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과거의 '민중'과 현재의 '대중'을 정확히 구분할 잣대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구분짓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가 '과거는 옳고 현재는 그르다'는 식의 가치관을 주장한다. 내가 저자에 동의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사람을 일시적으로 바보로 만들거나 한 사람을 영원히 바보로 만들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바보로 만들 수는 없다"는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격언을 우리는 최근까지도 자랑스럽게 믿어왔다. 이것은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신념이다. 가슴에 와닿는 링컨 대통령의 이 교훈은 두 가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그 중 첫번째 민주주의 전제는 가짜와 진짜, 그리고 선동적인 정치가의 거짓말과 언제나 있어야 할 진실 사이에는 명백하고 가시적인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민주주의 전제는 사람들이 가짜보다는 진짜를 더 좋아해야 하고, 명백한 진실과 인위적인 이미지 중 하나를 고르라면 사람들이 진실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들 민주주의 전제조건들 중 어느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낮고 순수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미국 문명의 거대한 진보와 변화가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우리 의식에 꽉 차 있는 가짜 사건은 진실도 아니고 허위도 아니다. 가짜 사건을 발전시킨 미국 문명과 기술진보가 이미지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더 매력적이고, 더 인상적이고, 더 설득력 있는 것이 되도록 계획하고, 조작하고, 왜곡하였다.
(62-63쪽)

인용된 부분에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이유로 '미국 문명의 거대한 진보와 변화'를 들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미지'가 판치지 않는 세상에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졌는지 궁금하다. 저자가 인용한 링컨 때만 해도 민주주의가 전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과연 저자는 링컨 때 미합중국이 민주 국가였다고 믿고 있는 걸까.

책에서는 심지어 여행과 관광을 대비시키면서, 옛날의 여행은 위험을 무릅쓰고 온갖 고난을 헤치고 나가 '전혀 모르는 동네'에 홀로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요즘의 관광은 완전히 패키지화된 한심한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 진단 자체에는 불만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의 가치관이 개입된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 역사에서 위대한 감동을 주는 부분은 대개 우리 선조들이 이런 위대한 여행을 감행했던 시기였다(122-123쪽)" "현대 미국 관광객들은 여행 경험을 가짜 사건으로 채우고 있다. (중략) 미국인들은 세상이 온통 가짜 사건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항상 미국인들의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솔직하지 못하게 사업적으로 접근하는 가짜 사건 공급자들이 있다.(124쪽)" 선조들의 '여행'은 '위대한 감동을 주는 위대한 여행'이고 현대인들의 '관광'은 '가짜 사건으로 가득 찬 관광'이다. 저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소수의 돈 가진 자들만이 여행했던 비민주적인 시대의 여행이 더 위대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럼 우리가 그 시대로 회귀해야 하는가?

저자의 이러한 주입식 가치관 교육은 마지막 장에 도달해 절정을 맞는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고, 과도한 기대를 줄여야 하며,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소리를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병을 고치는 첫단계는 이미지를 만들고 상상의 꽃을 피우는 현재와 미래 세계가 극복할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이미지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신으로부터, 우리가 싫어하거나 우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세계로부터 메시지가 오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낯설은 외부 아이디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나 공산주의자들이 꿈꾸지 못한 참신한 생각과 우리 이미지 거울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353쪽)

벗어나는 건 좋다. 그런데 왜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가? 단지 과거의 선조들이 믿었던 '실재'와 다른 '실재' -- 이미지 -- 를 믿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계속 심어주면서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솔직히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저자가 인용했던 버클리처럼,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과거가 우월하고 현재가 열등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물론 저자의 논점 중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좋은 말들이 많다. 이 책을 통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고, 언론과 정치의 허황됨을 널리 퍼뜨릴 수 있다. 민중 계몽에 힘쓰는 사람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만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고 근거 없는 당위성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책 같다. 이렇게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이 책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고맙게 생각한다. 이 책에도, 이 책을 권해준 친구에게도. :)
by 로보스 | 2008/02/10 00:57 | |감상| | 트랙백 | 핑백(3)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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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저자는 도시, 웹(www), 심시티와 심즈 -_- 등에 창발성 이론을 적용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들어서자 인문학/사회학의 냄새가 확 풍겼다. (중간에 &lt;이미지와 환상&gt;도 인용된다 ^^;) 저자의 정체를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과학 이론을 인간 세상으로 끌고 와서 적용시켜보려는 노력을 볼 때 저자가 인문학 쪽 출신이 아 ... more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8/02/10 02:27
민중 / 대중의 대조를 보니, 중세 / 근대를 대조하는 전통적인 문구들이 생각나는군요. 진짜 사건 / 가짜 사건의 대조도 그렇구요. 아마 그 저자 한 사람의 한계가 아니라, 그 저자가 속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글쓰기 전통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의식에 꽉 차 있는 가짜 사건은 진실도 아니고 허위도 아니다. 가짜 사건을 발전시킨 미국 문명과 기술진보가 이미지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더 매력적이고, 더 인상적이고, 더 설득력 있는 것이 되도록 계획하고, 조작하고, 왜곡하였다."

요런 대목은 보드리야르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ㅎㅎㅎ
Commented by 키오쿠 at 2008/02/10 10:24
현재에 대해 비판적이 되다 보면 과거에 대한 환상을 품기 쉽죠. 산업화 이후에 비인간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이전의 삶은 유토피아였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 예시라고 들었습니다 ^^; 일관적으로 시선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2/10 22:04
WizardKing님// 글쓰기 전통의 한계- 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글을 쓰더라고요. 왜 이렇게들 '분류'를 좋아하시는지 -_-; 뭐 그건 그렇고 저 아저씨, 보드리야르 닮았죠? :)

키오쿠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 그것도 아니면 미래에 대한 환상이라든지 회의주의가 되어버리는 것 같더군요 ㅎㅎ 키오쿠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8/02/10 22:40
하하.. 그나저나 이 책은 저두 읽어봐야겠네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2/10 22:53
WizardKing님// WizardKing님의 독후감을 기대하겠습니다 :)
Commented by 긁적 at 2008/02/13 03:39
흠. WizardKing님, 키오쿠님, 로보스띠, 저는 서로의 블로그에서 왠지모르게 자주 보이는군요. ㅋㅋㅋ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2/13 08:39
긁적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ㅅ-)a
Commented by naki at 2008/03/10 12:56
이 책 쓴 사람은 너무 옛날 사람이라 그렇다. -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어. 나름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해. 나도 저런 교훈적 말투는 질색하지만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선 나쁘지 않지.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3/10 15:53
naki// 하긴 그러네. 책 자체가 나쁜 건 아냐 ^^ 그냥 교훈적 말투가 싫었을 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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