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북>, 뿔.

/* 오랜만에 쓰는 독후감이네. 원래 이 책은 12월말에 다 읽었는데, 인도 가는 바람에 독후감을 제 때 올리지 못했다. 아직도 써야 할 글들이 엄청 남아있는데 시간이 잘 안 나네 orz 하나씩 하나씩 써나가야지. */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도리스 레싱의 <황금 노트북>. 이 책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지만 독서클럽에서 12월의 책으로 결정되는 바람에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난 원래 문학에 깊은 이해가 없는데다가, 이런 류의 '어려운' 문학을 평소에 그리 즐기지 않기 때문에 읽는 것이 상당히 곤욕이었다. 게다가 웅진에서 만든 출판사 주제에 맞춤법 및 번역이 엉망인지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다. 일례를 들자면 줄표와 붙임표의 혼용, '따듯한' 등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 사용, '패러디' 등 문맥상 어색한 단어의 남용 등이 있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문단이 부드럽게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중간중간 탁탁 걸리는데 그걸 어떻게 죽죽 읽나. 그래도 그런 어려움을 참아가며 꾸역꾸역 다 읽었고, 읽다보니 이해가 살짝살짝 되면서 흥미가 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작가인 내게 여전히 가장 교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다. 가령, 이 책을 쓴 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한 주에 세 통의 편지를 받는다. (중략) 한 부류의 편지는 전적으로 남녀 간의 전쟁만을 언급한다. -- 그들은 몇 장에 걸쳐 온통 남성이 여성에게, 또 여성이 남성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구는지에 대해 쓰고 또 쓴다. 아마 그녀가(항상 여성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다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두 번째 부류는 아마도 나처럼 탈당한 공산당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보내는 정치에 관한 편지들이다. 그 혹은 그녀는 오로지 정치에만 몇 장씩 할애할 뿐 다른 주제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세 번째 부류는 과거에는 드물었지만 현재는 나머지 두 부류만큼이나 수가 늘어났는데, 정신병 이외에는 다른 어떤 주제도 보지 못하는 남성과 여성들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동일한 한 권의 책이다."
(1권, 35쪽)

저자가 서문에서 직접 이렇게 밝히고 있듯,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주제가 있겠지만, 이 책에는 다양한 제재들이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각자 보는 '주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언급한 '주제'들 외에도 인종차별 문제, 교육과 학습 문제, 예술가의 정체성 문제 등이 '주제'로 제시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주제'는 '여류 이혼모 예술가의 정체성과 그 붕괴'인데, 결국 이 책은 레싱이 스스로 겪은 '여류 이혼모 소설가'의 삶을 표현한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주제'들도 전부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투영한 주인공이 겪는 갈등과 괴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등장 인물 뒤에 숨어 자신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그런 저자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독자들과 대하는 공간,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붕괴'의 주제 -- 사람들이 때로 무언가를 '파괴함'은 자기 치유의 한 방식이자 자기 안의 그릇된 이분법과 구별을 소멸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붕괴'에 대해 써왔고, 나 역시 그때 이래로 그러했다. 그러나 자잘한 단편을 제외하곤 내가 붕괴를 주제로 삼은 것은 이 소설이 처음이다. 여기서 '붕괴'는 더 거칠고 더 경험에 가까우며, 경험이 일정한 사고 양식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어쩌면 날것 그대로이기에 더 소중하리라." (1권, 9쪽) 레싱이 뭘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내가 읽은 것은 '소설가의 붕괴', '여자의 붕괴', '엄마의 붕괴'였고,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의 붕괴를 묘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용을 상술하는 것은 스포일이 될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마무리지어야겠다. 어려운 소설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소설이다. 번역만 조금 더 괜찮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네.
by 로보스 | 2008/01/14 22:43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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