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 <대지>, 시사영어사.

누구나 청소년기에 한번쯤 읽어보는 유명한 소설. 그러나 피폐한 청소년기를 보낸 로보스는 이 책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마침내 20대 중반의 늙수그레한 나이에 들어서야 겨우 친구들과 결성한 '독서 클럽' 덕분에 이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싸고 실용적인 책을 사겠다며 영한대역에 페이퍼백으로 된 시사영어사 버전을 골랐고, 이 버전은 로보스를 실망시키지 않고 역시나 날림 번역에 중간중간 내용 빼먹기 신공을 구사하여 큰 감동을 남겨주었다.

...라고 헛소리를 좀 쓰고 시작합시다.

사실 11월 중순 경, '독서 좀 하자!'라는 생각이 들어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독서 클럽>을 창설했다. 이런저런 토론 끝에 그 첫번째 책으로 선정된 녀석이 바로 이 <대지>. 유명한 책임에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 -- 분량도 작고 -- 이 책으로 선택했는데, 읽기는 후딱 읽었으나 또 막상 저자의 생각을 일일이 파악해보려니까 쉽지 않더라.

기본적으로 이 책은 20세기 초반 중국에 사는 한 농부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왕룽은 '대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끝내 거농으로 성공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왕룽의 아들들은 아버지 몰래 그 '대지'를 팔려 한다. 원래 이 책은 3부작으로, 이후 <아들들>과 <분열된 집>으로 내용이 이어지면서 '대지'를 판 아들들의 이후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숨겨져 있는 문학적 장치들에 대해서는 내가 문학에 무지한 관계로 평하기 힘들고, 그저 소설에서 묻어나는 20세기 초반 중국의 모습에 대해서나 얘기해볼까 한다. 우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 중국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아편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지고 있었는가, 중국인들의 미녀상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20세기 초반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어떠했는가와 같은 지식들이다. 사실 몰라도 '소설'을 읽는데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책의 기본적인 배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소설 자체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책이므로 역사적인 가치도 어느 정도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알고 있는 중국사 지식이 눈 앞에서 살아 꿈틀대는 느낌을 받았다. 교과서에서, 교양서에서 딱딱하게 접한 지식들이 등장인물들의 살아있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될 때의 감동. 난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이제 책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왕룽이 마지막으로 소리치는 장면이다.

"It is the end of a family -- when they begin to sell the land," he said brokenly. "Out of the land we came and into it we must go -- and if you will hold your land you can live -- no one can rob you of land-"

콘크리트 아파트 속에서 태어나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뛰어놀고 인공적으로 깔아둔 모래밭에서 자란 나는, 솔직히 토지에 대한 왕룽의 집착을 잘 이해할 수 없다. 교과서나 텔레비전을 통해 농부들의 삶과 꿈에 대해 배우지만, 그건 그저 저 멀리 있는 '당신들의 삶과 꿈'일 뿐 나에게는 하나의 지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집념이 절박하고 간절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절박한지는 잘 모르겠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안 되는 상태랄까.

그래,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흙만 만지며 살아야 하는가?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머리에 집어넣은 농자천하지대본의 악령이 끊임없이 나를 반발의 길로 내몰고 있다. 이 악령이 나에게 "흙은 좋은 거다. 자연은 좋은 거다."라고 속삭일 때마다 내 마음은 그에 대한 분노로 들끓어오른다. 이 악령의 수고 덕분에 수많은 서울시민들이 교외를 동경하고 녹지를 꿈꾼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로 흙이 그렇게 '좋은' 걸까? 시골에서 그저 철없이 뛰어노는 아이가 서울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보다 '좋은' 걸까? 그렇게도 조국 근대화를 외쳤던 이 나라에서, 왜 이런 환상이 생긴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이는 다 내가 '흙'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일게다. 나는 흙과 동화되어 덩실덩실 살 수 없다. 그저 저 멀리 제 3자의 입장에서, 흙을 분석하고 농부를 분석할 뿐이다. 이 길이 '더 나은' 길인 걸까. "No one can rob you of land-" 왕룽의 절규가 귓가에 맴돈다.
by 로보스 | 2007/12/18 00:38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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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유현종 at 2007/12/18 22:15
독서 리스트를 보니 정말 존경스럽네요. 제가 읽고 싶은 책들도 꽤 있고요.
Commented by 유현종 at 2007/12/18 22:25
그리고 로보스님 지난 답변 감사합니다. Chomsky 저작을 읽고 싶었는데 읽을 만한 번역서가 없어서 김진우의 언어습득의 이론과 실상이란 책을 구입했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12/19 01:29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요새 들어 제가 알고 있는 게 얼마 없다는 걸 깨닫고 매일 같이 좌절 중이랍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도 얕은 지식에서 나온 말에 불과하니 잘 가려 들으시길 바랍니다 ^^;

방문 고맙습니다 :)
Commented by Yuki37 at 2007/12/19 01:49
우리집은 주말농장을 해서 10년 넘게 텃밭을 가꿨기 때문에 난 수도권 거주자치곤 흙을 꽤 많이 밟아본 편이랄까. 그래선지 난 가장 공감가고 감동받은 장면이 나중에 왕룽이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돌아와서 신발을 벗고 흙을 밟으면서 땅을 스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장면이었음 ㅋㅋㅋㅋ 내가 쫌 서울 촌사람ㅋㅋ

근데 정말 경기도는 좀 덜한데 서울쪽은 흙밟기 힘들 것 같다=ㅅ=...전에 과천살때는 애들 데리고 소농장 지나다니고 개울물 뚝방따라 뛰어다니고 그랬는데 ㅋㅋㅋ 근데 정말 흙밟으면 기분이 좋아져~ㅎㅎ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12/19 22:23
유키누나// 그런가 -ㅅ- 각박한 서울 사람인지라 흙 밟으면 "아씨 발 씻어야 되잖아"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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