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마리 장브, 세 현인 이야기 - <학문의 정신 아리스토텔레스>, 한길사.

'세 현인 이야기'의 마지막 책, <학문의 정신 아리스토텔레스> 편이다. 어느 교수님께서는 과학사의 최대 위인 둘을 꼽으라면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을 꼽겠다고 하셨는데, 사실 우리나라 과학교육에선 아리스토텔레스를 상당히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연유로 대학 2학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 발전을 가로막은 세상 최고의 악당인 줄 알았다. 그러다 '과학기술과 역사'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어머나 +ㅁ+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 킹왕짱이었던 것이다. 2000년간 지속된 학문 체계가 괜히 지속되었던 게 아니야. 그 이후 여러 과학사 책이나 철학사 책들을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함을 재차 깨닫게 되었고, 이번에 '세 현인 이야기' 책을 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더욱 깊이 알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이 책은 어려웠다. 일단 저자와 역자가 모두 이전 <대화의 철학 소크라테스><진리의 현관 플라톤>과 다르다. 이 두 권을 쓴 마르틴은 상당히 눈높이를 낮춰서 친절하게 설명해준 반면, <학문의 정신 아리스토텔레스>를 쓴 장 마리 장브는 난해하게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건 역자의 잘못도 일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의 번역은 이전 책들의 번역에 비해 한 단계 아래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고민하던 중, 이전 두 권의 경우 저자와 역자가 모두 철학 전공인 반면 이 책의 경우 저자와 역자가 모두 철학 전공이 아니라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저자 장 마리 장브는 언어학자고 역자는 독문학자다. 그러다보니 철학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혹은 남경태 씨처럼 아는 척 하기 위해 있는대로 늘어놓았다거나. 물론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은 그냥 글을 어렵게 쓰는 취향이 있다는 것이겠지만. :)

책 도입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개괄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를 중심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네 개의 철학적 기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개진해 나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적 · 철학적 초상화를 그려보고자 한다. (50쪽)
이전에 지젝님이 달아주신 덧글에서처럼, 사실 철학자의 삶과 그의 철학은 분리해서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은 몽땅 빼놓고 그의 철학만 논하는 이 책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는 그의 철학을 기초, 방법, 내용, 목적의 순으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분류 역시 타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형식논리학은 '방법'에 속해있는데 이는 '기초'로 분류해도 상관없는 거 아닐까? 새뮤얼 이녹 스텀프와 제임스 피저가 공저한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2005)라는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논리학 → 형이상학 → 물리학/생물학/심리학 → 윤리학 → 정치학 → 예술철학]의 순으로 훑고 있는데 차라리 생각의 흐름을 탄다는 측면에서 이쪽 분류가 더 타당해 보인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책의 흐름을 타는 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이 책 속에서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책을 다 읽었지만 머릿속에 남은 내용은 거의 없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가 난삽하게 진행되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작들 간에 서로 큰 차이가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찬반 논쟁은 특이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저서가 완벽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모두 400여 권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143권의 제목만 남아 있다. 이중의 일부는 고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일련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외의 또 다른 저작은 250년 간 묻혀 있다가 발견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바로 이 저작에 기초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상의 두 군(群)의 저작들이 문체와 내용 면에서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41쪽)

결국 이 책에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이론들을 흐름 없이 난삽하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체계가 위대한 것은 그 체계가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한 분야와 다른 분야를 긴밀하게 묶었기 때문인데, 이런 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뒤에 바로 이어 윤리학이 나오는데, 두 학문 간의 인과성이라든지 연결성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이리저리 많이 인용하는데, 아무런 해설 없이 인용구만 줄줄이 달려있는 부분이 많아 힘들 때가 많았다. 물론 어떻게 보면 원전을 접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좋은 시도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따라가야 할 흐름은 달라고! 그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글들을 던져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고작 한 절로, 그것도 물리학은 완전 무시당하면서 나온 걸 보고 또 꽤나 실망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동력(動力, Dynamik)의 역할은 매우 불행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 근세의 물리학은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논박하면서 발전되어왔다.
방법론, 특히 경험적 연구와 관련된 방법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로는 이미 언급되었다. 이 방법론은 테오프라스토스와 그의 제자 스트라톤의 논문과 일련의 의사들의 작업에서 아주 훌륭한 결실을 보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경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계자들에게서는 그토록 축소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문화사적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지리학자와 광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에서 자신들의 학과와 관련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이는 후일 소요학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의 광물학과 15세기의 광물학 사이에 거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그 이유는 특별히 중세의 광물에 대한 관심이 비학문적이고 주술적인 방법으로 보석을 생산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적 업적 중 가장 광범위하면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생물학이다.
(후략, 212쪽)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말하는 저자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다. 이후 저자는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옳게' 밝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고 말하는데, 내가 볼 때 이들은 그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한 과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체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철학자들도 세상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들은 세상의 특정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야, '모든' 세상을 단일한 체계로 설명하려는 학문적 조류가 확고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과학이 '하나의 체계'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덧붙여-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서양 근세의 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논박하면서 발전되었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다. 당시 운동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것 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그걸 논박하지 않으면 새로운 이론을 내세울 수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중세 시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에 담겨있는 문제들이 일부 밝혀졌고,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그 문제들이 심도 있게 연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근세의 과학혁명이 중요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기 때문이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반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책을 쓰려면 그 분야에 능통한 전문가가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전공을 했느냐의 여부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전공 공부를 하는게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이 아니라 해당 학문의 개념과 정신을 익히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외부인이 열심히 지식을 배운다고 해도, 이미 개념과 정신을 갖춘 사람들을 따라가려면 많이 힘들겠지. 책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내려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고 싶다면 이 책은 비추. 초보자에게는 너무 어렵고 전문가에게는 너무 쉬운 느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려면 차라리 다른 책으로 하기를 권한다.
by 로보스 | 2007/12/07 21:42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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