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과학.
요새 철학 책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철학은 '과거'를 보며 옛날 철학자들의 저작을 재해석하곤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철학을 열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라도 옛 철학자들에 대한 자신들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니체의 플라톤 해석이라든지?) 곧 철학에서 '해석'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철학에서 '번역'이 중요한 이유도 그것이리라. 한 언어와 다른 언어의 단어들이 전부 일대일 대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단어라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역자의 '원서 해석'에 따라 번역 또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누가 번역했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철학에서 해석이 중요한 것일까? 철학과 비슷하게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은 과거 문헌의 해석에 그리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 이는 '통일된 지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계 어느 과학자에게 물어도, 기본적인 과학 지식들(예를 들어 분자나 원자, DNA, 강체 등)에 대한 개념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 반면 철학은 그렇지 않다. 플라톤의 '이데아(Ιδεα)'에 대한 통일된 해석이 존재할까? 나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플라톤 이데아 개념에 대한 논문을 쏟아내고 있으며, 심지어 학회 주제가 그런 '개념'에 대한 이해로 맞춰지기도 하는데 통일된 해석이라니.

그럼 이러한 철학과 과학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 꼭 철학과 과학에 한정지을 것도 없이, 다른 학문들을 둘러봐도 이 두 가지 방법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경제학 같은 학문은 과학과 같은 방법론으로 연구되는 반면, 신학의 경우는 철학과 비슷한 방법론이지. 도대체 이 학문들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상반된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걸까?

오늘 읽은 <진리의 현관 플라톤>이라는 책 pp. 122-125에서 이에 대한 좋은 힌트를 하나 얻었기에 기록해둔다. 여기서 저자 마르틴은 플라톤이 '이데아에 대한 교과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 부분(『제7서한』, 314 a-e)을 인용하면서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그러나 이(남들이 이데아에 대해 저술할 수 없다는 발언-로보스 주)보다 한결 어려운 점은 플라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저술은 지금도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있지 않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쓴 대화편들에서마저 마찬가지로 저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그의 나이 거의 여든이 되어 던진 이 말에 비추어서 우리는 그가 남긴 대화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pp. 123-124)

저자는 이 문제가 '철학' 자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내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은 부분도 여기다.

플라톤의 선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선언이 철학적 사유를 문자화하는 것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구두로 말하는 것과도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이것들에 대해 쓰거나 말한다면, 내가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철학이 내면적으로 갖고 있는 근원적인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그는 철학적 진술을 인간의 혼 안에 던져진 불꽃에 비유하고 있다. 수용 태세가 되어 있는 혼이라면 이 불꽃을 그의 혼 안에서 계속 타오를 수 있는 불로 만들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의 모든 (공개적 철학으로서 문자로 씌여진-옮긴이) 대화편들과 (비공개적 철학으로서 구두로만 전달된-옮긴이) 가르침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혼에 던지는 불꽃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플라톤에 관해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는 자는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하나의 불꽃과 같은 영향을 미칠 따름이요, 가능한 한 강력한 반향을 기대할 뿐이지 이를 넘어서는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하겠다. (p. 125)

여기서 철학은 그걸 받는 이에게 '불꽃과 같은 영향'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철학의 수용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교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 이것이 포인트다. 반면 과학은 수용자에게 '이런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철학이나 과학이나 '세상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제공하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그 설명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이해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그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고, 철학은 그 기대가 헛되다고 믿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내 생각에는, 어느 한 쪽이 옳다기보다 과학과 철학이 다루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다. 국제 과학 학술대회에서 특정 개념에 대해 그 개념을 재정의하지 않아도 대화가 통하는 것을 보면, 과학 분야에 한해서는 과학의 기대가 잘 맞아들어가는 것 같다. 인간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각' 부분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렇기에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 -- 자연 -- 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이해되는' 설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한편 철학은 보통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보다는 그렇지 않은 대상 -- 도덕이라든지 인식, 존재, 선, 미, 언어 등 -- 을 다루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에서도 시공간의 의미라든가 생명의 의미 등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서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음을 볼 때, 이 추측이 꼭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철학이 '과거의 철학자들'에 집착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설명'은 많은 수의 지지자를 얻은 설명이다. 그건 그 설명이 -- 설령 지지자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해도 --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설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효과적인 설명을 창안하기란 쉽지않기 때문에, '과거의 철학자들'을 공부함으로써 일리가 있는 설명을 만들어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해석' 역시 과거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텍스트를 '설명'하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해석이란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불꽃'조차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 '불꽃'이 어떠한 형태인지 규정하는 것, 일종의 메타언어 같은 것이랄까. 예를 들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칸트가 '물자체(Ding an sich)'를 제시했을 때, 그 관념 또한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이었다. 결국 많은 해석자들이 그 관념을 '좀 더 쉬운' 언어로 해석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 관념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설명'하기 때문이랄까.

뭔가 말이 계속 꼬이는데 -_- 하여간 난 대충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도 한 번 고민해보시고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셨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
by 로보스 | 2007/11/04 01:07 | |잡념| | 트랙백(2)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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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소넷 지젝 at 2007/11/04 15:57

제목 : 신의 진혼곡 뒤에서
드디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Ding an sich)에 대해서 험담할 수 없게 되었다. 칸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던 의사는 우리에게 신의 사망진단서를 나누어줬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아는 체하며 지식을 뽐내고 있던 환자의 가족들 – 환자의 차트에는 망상가, 신비주의자, 사이비 종교단체장로 기록되어 있었다. - 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more

Tracked from 끔찍하게 오덕한 서가 at 2008/07/14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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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는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을 공부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생물학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생물학은 과학적인 탐구 방법을 사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결론을 내린다는 면에서 최소한 무엇인가를 제대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탐구하기 위해서는 분석할 만한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고, 아무리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고트프리트.. at 2007/11/10 16:25

... 래도 이데아 이론이 맞다고!" 이렇게 대응을 하더군 -_-;; 이 책에서는 플라톤 저작들을 분석하여 이데아의 개념이 어떻게 변천해 가는지 설명하고 있다. 일전에도 잠깐 썼지만, 결국은 이데아라는 것도 워낙 애매한 개념이라 후배 철학자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각자의 개념 ... more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11/04 15:54
...'철학'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까?
Commented by luuna at 2007/12/29 06:39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이론이 현재 어느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얘기를 따른다면 현재 과학계의 주류에서 활동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철학 사이의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여진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개념의 정립에서 과학자들 사이에 대부분 일치를 보는 것은 그 패러다임의 영향이죠. 그에 비해 철학이라는 영역은 로보스님이 사용한 과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영역에 비해 훨씬 더 넓은 셈입니다. 제 블로그에 오시면 철학의 영역에 관한 제 생각을 보실 수 있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12/31 13:52
luuna님// 반갑습니다. :) 쿤의 이론으로 접근할 생각은 못 해봤군요. 하긴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이미 형성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면 의문이 하나 생기는데- 철학은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학문인 셈인가요?
Commented by Asuka_불의넋 at 2008/07/14 00:42
트랙백 걸기에 가장 적절한 글(..;;)인 것 같아서, 일단 트랙백 보냅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분들께는 기분나쁜 글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좀 무지렁이 과학도라서요... 이 점은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7/14 19:59
Asuka님// 시간 나는대로 글 써서 트랙백 날리겠습니다 :) 저 역시 무지렁이 과학도인지라...;; 다른 분들의 의견도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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