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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다보면, 대개 첫 부분에 '그리스 자연철학'이 등장하곤 한다. 내가 처음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운 것도 '과학기술과 역사' 수업 시간이었고, 이들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주원인도 과학사였다. 그러다가 과학철학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인식론과 실재론 관련해 철학사에도 흥미가 생겼고, 역시 여기서도 '그리스 자연철학'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종종 만나다보니 이제 이데아가 어떻고 질료와 형상이 어떻고 하면서 풍월을 읊을 줄은 알게 되었는데, 문제는 막상 깊이 있는 공부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얕은 지식으로 친구들 사이에선 폼 좀 잡을 수 있었지만, 철학 하는 분들과 대화하면 금방 밑천이 바닥날 게다. 나도 이런 상태가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파이돈>이나 <국가>를 덜컥 잡기에는 겁이 났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알라딘에서 '세 현인 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심드렁히 책 소개를 훑어보던 중 '개론서와 원문 사이의 적당한 난이도로 쓰여진 책'이라는 독자평에 눈길이 멈췄다. 즉.시. 질.렀.다. 이 책, <대화의 철학 소크라테스>는 그 시리즈의 첫번째 책이다. 지금까지는 여러 권의 책도 하나의 시리즈라면 그냥 한 번에 묶어서 쓰곤 했는데, 이 책들은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따로 독후감을 마련한다. 아직 첫번째 책 밖에 읽지 않았지만, 이 한 권의 책만으로도 한 편의 독후감을 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 셋을 한 편의 독후감에 밀어넣는 것이 이들 위인들에 대한 모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계로- 기나긴 서설을 지나 이제 이 책에 대한 독후감 본편을 시작한다. 과학사 시간에 배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선생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조'가 전부였다. 김영식, 임경순 공저의 <과학사 신론>에도 소크라테스는 일곱 줄 안 되는 내용에 겨우 얼굴만 내밀 뿐이다. 꼭 과학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받은 학교 교육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윤리책에 잠깐, 역사책에 잠깐 얼굴을 내밀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인류 4대 성인 중 하나라는 소크라테스가 왜 그런 존재 밖에 되지 않는가? 이 책에서는 원전 -- 이라 해봤자 소크라테스는 본인의 저작을 남기지 않았기에 제자들의 목격담에 지나지 않지만 -- 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독자가 잘 몰랐던 소크라테스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서 내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내가 지금까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상(像)이 완전히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소크라테스의 생애, 소크라테스가 남긴 대화,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다. 읽어나가면서 처음에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내 허상들이 깨지는 것을 느꼈고, 중반에 접어들어 소크라테스에 대한 경외심이 솟아나기 시작했으며, 종반에 도달해서는 다른 이들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소크라테스를 '진리'를 좇아 꿈 같은 형이상학 속에서 살아간, 거만하고 현실 세계를 무시하며 살았던 개똥철학자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공자보다도 더 '말'만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살펴보니 그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에서 앞장서며 전우들을 독려했던 용기있는 군인이었고,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그 재판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도 계속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은 인격자였다. 게다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계속 유지했으며, 현세의 고통에 늘 초연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진리에 대한 독선'에 가득한 변설가로 이해했던 나의 지식은 어찌나 편협한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한 두 개의 축 -- 다이모니온과 로고스, 이들도 인상적이었다.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가 '신들'로부터 받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 계시는 항상 '무엇을 하지 말라'는 형태로 내려오는데, 그는 이 계시를 통해 스스로 위험을 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한다. 이성과 논리의 상징처럼 보였던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면모가 있음은 놀랍지 아니한가!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다이모니온이 아니라 로고스에 있다. 내 닉네임의 어원이기도 한 '로고스(ΛΟΓΟΣ)'는 말(言)/이성/관념/명제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리스어 단어로, 소크라테스는 '가장 좋은 로고스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90쪽).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황금기는, 소크라테스의 로고스가 아니었으면 시작도 못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밀려 과학사 한 구석에 쳐박혀 있는 소크라테스가 더욱 가련하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흥미로운 소크라테스의 삶과, 지혜로운 그의 대화들이 가득 담겨있다. 용량 관계상 -_- 다 쓰지는 못하겠고, 그저 내 지식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몇 가지 사실만 더 언급하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전혀 악녀가 아니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목격자들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에 의하면 크산티페는 도리어 소크라테스에 대해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했던 것 같다(39쪽). 충격적인 사실 하나 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책 마지막 부분(248-260쪽)에 실린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그 어디에서도 저 비슷한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그럼 뭘까?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한 한 글이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정치적 이익과 맞물려 헛소문이 유포된 것이다. 끝으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이라는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는데 갚아주게."는 아무래도 오역인 듯 싶다. 나는 저게 유언이라는 걸 듣고 '음 역시 위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빚을 청산하려 하는구나 -_-'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260쪽)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 신께 닭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데, 잊지 말고 꼭 바쳐주게나."라고 명확하게 번역해놓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거 관련해서 재미있는 글들 [1] [2] [3]이 좀 보이네. :) 무척 견실한 책이고, 그리스 철학에 1 ng의 관심이라도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철학 교육이 어찌나 빈곤한지 뼈저리게 깨달았고, 내 소양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 시리즈를 다 읽고 나면 원전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이제 다음 책, <진리의 현관 플라톤>을 향해 출발하련다. 같이 가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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